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비관우자앙비 Sep 20. 2017

내 인생 이야기#2

과연 언제까지 쓸 수 있을까. 성인이 될수록 부끄러운 기억인데.

나는 순응적인 아이였다. 어떻게 보면 권력 지향적 아이였다. 아주 운이 좋게 국민학교 3학년과 4학년 때 나를 예뻐해 주는 담임 선생님을 만났다. 그 당시 나는 한글을 배우지 않고 교육 과정에 들어갔는데, 큰 머리 덕에 많은 책을 독파하고 있던 시기였다. 2교시가 끝나면 간식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그때 선생님들 휴게실에 불려 가서 어제 읽은 책 이야기를 5분 정도로 하는 미션이 있었다. 날마다. 왜 시작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무튼 그 들의 입장에서 나는 신기한 아이였나 보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놀란 건지, 놀란 표정을 해주는 건지 하는 어른들의 표정을 조정하는데 충분히 아이의 강점을 이용했던 것 같다. 그리고 선생님들에게 잘 보이면 학교 생활이 편하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문제를 피우는 학생도 아니었다. 학업 성적 우수한 편이고 교우 관계 원만한 편이라고 생활 기록부에 쓸 수 있는 학생이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하지만 그때부터 나대는 성격이 되어버린 나는 교우 관계에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아이들하고 놀긴 놀아야겠는데, 국민학교 2~3학년 때부터, 아 나는 이 아이랑 꼭 친해져야 좋을 것 같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애늙은이라는 표현을 듣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때는 칭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더라. 모든 행동에 목적성을 갖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부터 진짜 관계가 아닌 계약적 관계에 대한 탐닉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당연히 결과는 좋지 않지.


어머니 아버지 모두 둘째 이시지만, 어쩌다 보니 일 번으로 양가의 조카가 되어버린 나에게 쏟아지는 사랑은 어마 무시했다. 웬만하면 내 뜻대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체득되어 있는 듯했다. 부모님은 당연히 첫 아이에 대한 것이었고, 양가 어른들에게도 첫 조카이자 손자이기 때문에 귀엽기만 했지, 딱히 혼났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이건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다. 어머니께서도 그때 아주 혼구녕을 내서 정리하는 습관 등을 만들어 놓아야 했다고 하시는데, 이건 나도 Vㅔ리 동의하는 포인트. 


그러다가 이사를 했다. 이사는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첫 이사는 국민학교 4학년이 끝나고였다. 당시 공무원이시던 아버지가 과천의 정부종합청사로 발령이 나신 거다. 원래는 안양 인덕원에서 외삼촌과 함께 사시다가 가족을 불러 올린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건 어머니께 물어봐야겠다. 전후 관계가 갑자기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이 첫 이사에서 나는 고향에서의 자신감 넘치던 모습이 온데간데 없어지고 병약하고 어디에 숨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 생성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사당동에서 시작한다.


광주 풍향 국민학교를 1~4학년을 다니고, 5학년을 사당동 남사 국민학교에서 다니게 되었다. 그때 살던 집은 꽤 고지대에 있는 단독 주택의 2층이었다. 그니까 주인집이 1층에 있고, 우리 집은 2층, 아마 전세였을 거다. 그래도 꽤 넓은 테라스가 있는 곳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주거 환경 되게 좋았던 것 같다. 첫 인지 부조화의 시작은 재활용품 수거였다. 그 당시만 해도 학교에서는 매주 재활용품을 수거하는 날이 있었다. 광주에 있을 때는 유리 공병부터 시작해서 폐지까지 다 가져가도 되었었는데, 서울에 와서 보니 폐지만 수집을 하더라. 집에서부터 달그락대면서 유리병을 들고 갔다가, 아연질색과 경멸감이 섞인 6학년 주번 형아들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개놈들. 그럴 수도 있지. 


아아, 그런 일도 있었다. 4학년 때 쪽지 시험에서 ‘ㅎ’으로 시작하는 단어를 쓰세요라는 문제에 ‘히프’라고 써서 틀렸던 일. 로마자 표기에 대한 지식이 일언반구도 없었던 선생님이었던 게 분명하다. 항상 내 지식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가 처음으로 기세가 꺾인 기억이기도 하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나눠주던 30cm 플라스틱 자로 손등을 맞았다.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와 체벌 반대.


생각난 김에 하나 더, 살다가 울다 지쳐 잠든 게 두 번이다. 한 번은 광주에서 서울로 이사 가면서, 5톤 트럭 운전석 뒤에 있는 침대 같은 공간에서 307호 아줌마가 주신 과자를 먹다가, 또 한 번은 고1 때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장지로 가면서였다. 사실 난 눈물이 진짜 많은 사람이었다. 지금은 하품할 때 빼고는 눈물이 잘 흐르지 않는다. 눈물 관련 에피소드는 따로 함 정리해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인생 이야기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