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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정 Oct 05. 2020

11. 아이에게 말 건네기 <그레이스는 놀라워!>

- 책 모임 《책 읽는 도토리》이야기

세상의 편견에 맞서는 용기 <그레이스는 놀라워!>


  어떤 한 장면이, 인물의 어떤 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책이 있다. <그레이스는 놀라워!>가 그런 책이다. 책 제목만 봐도 연두색 옷을 입은 피터팬이 두 눈을 감고 이제 막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조금 특별한 피터팬이다. 하얀 피부에 금발을 한 소년이 아니라 검은 피부에 곱슬머리를 가진 소녀 피터팬이기 때문이다. 이 소녀의 이름은 그레이스다. 그레이스의 빛나는 얼굴, 쫙 펴진 어깨, 우아하게 뻗은 손.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멋지게 해낸 사람의 행복한 모습이다. 나는 이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벅차 오른다. 

검은 피부, 곱슬 머리의 소녀 피터팬! 그.레.이.스


    그레이스는 이야기를  연극으로 꾸미는 걸 좋아한다. 학교에서 ‘피터팬’ 공연을 하기 위해 배역을 정하는데 그레이스는 피터팬 역에 도전한다. 하지만 친구들은 그레이스가 여자라서, 흑인이라서 피터팬 역을 맡을 수 없다고 한다. 시무룩해져 집으로 돌아온 그레이스. 할머니는 흑인 발레리나의 공연에 그녀를 데려간다.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될 수가 있어.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말이야.”라고 말해준다. 덕분에 그레이스는 용기를 내어 연기 심사에 도전한다. 당당히 실력을 발휘해 피터팬 역에 뽑히고, 공연을 멋지게 해낸다. 그레이스의 꿈을 지지하고, 꿈을 이룰 용기를 준 할머니 덕분이다.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될 수가 있어.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말이야.” 할머니의 이 말이 그레이스를 일으켜 세웠다. 우리 아이가 현실의 장벽에 맞서야 할 때,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몰라 좌절할 때. 가슴에 이런 말을 품고 있다면 얼마나 힘이 될까. 그레이스가 마침내 피터팬이 되어 무대 위를 훨훨 나는 장면을 떠올린다면 두 주먹 불끈 쥐며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책 모임 책으로 <그레이스는 놀라워!>를 골랐다. 그저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 안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너는 이래서 안 돼!’라는 부정적인 생각에 맞서는 ‘용기’에 대한 이야기로 읽고 싶었다.  


그레이스는 놀라워! (메리 호프만/시공주니어)
  책 읽는 도토리가 읽은 <그레이스는 놀라워!>


   책 모임에서 첫 활동으로 별점 주기를 자주 한다. 다짜고짜 “이 책 어땠어?”하고 물으면 아이들이 소감을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책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별로 나타내 볼까? 별 다섯 개면 진짜, 최고 좋았다는 거야.” 하고 별점 주기로 시작한다. 적당한 별 개수를 헤아리면서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생각해본다. “왜 별을 그렇게 줬을까?”에 답을 하다 보면 책 읽은 소감을 말하기가 수월하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마음을 열고, 입을 여는 일종의 워밍업 이다. 책 모임이 익숙해지면 별점 주기 없이도 책 읽은 소감을 잘 말할 수 있다. 별점을 주더라도 좀 더 객관적으로 책을 평가하고, 꽤 근사한 소감을 덧붙이게 된다.


  <그레이스는 놀라워!>는 아이들 대부분이 별 다섯 개를 줬다. 둘째 아이는 별 다섯 개도 모자라다며 별을 더 그려 넣어 열 다섯 개의 별을 그렸다. 아이들은 “그레이스가 마음에 들어요.”, “마음먹은 대로 해내는 게 좋아요.”, “재미있어요.”라고 했다. 이럴 줄 알았다. 그레이스라는 인물도 매력적이고, 자신의 꿈을 이뤄가는 이야기도 재미가 있으니 아이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 둘째 아이와 내가 좋아하는 책인데 다른 친구들도 좋다고 해주니 기뻤다. 책 모임 하며 이런 소소한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조금 힘들고 귀찮은 책 모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할 수 있다.


   이번 모임에서는 연극 기법을 활용해서 아이들이 인물의 입장을 잘 이해하게 하고 싶었다. 그레이스는 이야기를 몸으로 표현하는 걸 좋아한다. 책에서는 그레이스의 몸짓과 표정이 다양하고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아이들이 따라 해 보며 그레이스의 마음을 헤아리기 좋다. 특히 그레이스가 피터팬을 연기하며 뿌듯해하는 장면은 몸으로 꼭 표현해봐야 한다. ‘여자라서’, ‘흑인이라서’ 안 된다는 편견을 깨고 무대에 오른 그레이스. 그녀의 당당한 자세와 만족스러운 표정을 따라 해 보면서 아이들이 그 순간에 흠뻑 빠져들게 해주고 싶었다.


   저학년 아이들은  언제든지 이야기 속 인물로 변신할 수 있다. “자, 지금부터 우리는 그레이스가 되는 거야.”라는 말 한마디에 금세 책 속 세상으로 뛰어든다. “어떤 표정이면 좋을까?”, “어떤 동작을 하면 좋을까?” 하면서 좀더 자세히 표현하게 돕기만 하면 된다. 엄마의 진행이 서툴러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몇 가지 연극 활동을 정해서 책 모임에서 자주 해보자. 마음껏 움직일 공간만 마련해주면 아이들이 알아서 노닌다. 물론 엄마의 기대치를 많이 낮춰야 한다. 어른 보기에 우왕좌왕하는 것 같아도 아이들은 이야기 속에서 즐거이 뛰놀고 있다. 아이들을 믿고 편안한 마음으로 엄마도 함께 즐기면 된다.

책 속 인물이 되어 보기


    책 읽고 나서 간단하게 해 볼 수 있는 활동은 ‘인물 인터뷰’와 ‘정지동작 만들기’가 있다. 정지동작 만들기는 아이들이 알기 쉽게 ‘얼음 동작 만들기’라고도 한다. 이 두 가지는 학교 수업에서도 자주 활용한다. 이야기 줄거리 요약하기, 인물의 심리 살피기, 인물의 입장되어보기, 감상 나누기 등에 유용하게 쓰인다. 책 모임은 인원이 적기 때문에 아이들 모두가 다양한 역할을 돌아가며 해볼 수 있다. 간단한 동작을 만들다가 대사나 움직임을 넣어 바로 즉흥극으로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인수 학급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이라도 책 모임에서는 자신을 마음껏 드러낸다. 몸으로 표현하는 걸 즐긴다. 책 모임의 힘이다.


   먼저, 인물 인터뷰를 하기 위해 빈 의자를 하나 준비했다. ‘마법의 의자’라고 이름 붙이고, 이야기 속 인물 역할을  아이가 의자에 앉는다. 나머지 아이들이 인물에게 궁금한 점을 묻고, 의자에 앉은 아이가 인물의 입장이 되어 대답해주는 활동이다. “누가 그레이스가 되어 대답해줄래?” 하니 아이들이 손을 번쩍번쩍 든다. (저학년이라 발표를 좋아한다.) 평소 말을 적게 하던 아이를 의자에 앉혔다. 아이들은 그레이스에게 “넌 무엇을 하는 걸 좋아해?” ,“공연을 잘 해냈을 때 어땠어?”라고 물었다. 그레이스를 맡은 아이는 책 내용을 떠올리거나 그레이스의 마음을 짐작해서 답을 해줬다. “나는 연극하는 걸 좋아해.”, “진짜 좋았지. 피터팬을 못하는 줄 알고 속상했거든.” 그 순간 아이는 진짜 그레이스였다.  


   “이번에는 누구를 불러 볼까?” 하니 아이들은 그레이스의 엄마, 할머니 그리고 그레이스를 놀리던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 했다. 아이들은 그레이스의 엄마에게 “그레이스의 친구가 흑인이라서 안 된다고 했을 때 왜 화를 내려고 했어요?” , “그레이스 아빠는 왜 없어요?” 등을 물었다. 할머니에게는 “흑인 발레리나 공연에 그레이스를 왜 데려갔어요?”, “그레이스가 공연을 잘 끝내니 어떠셨어요?” 하고 물었다. 아이가 어른의 마음을 헤아려 답을 해주기가 어렵다. 내가 나서서 의자에 앉았다. “음, 나는 그레이스의 할머니야.”하고 할머니 목소리를 흉내 내니 아이들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에이, OO의 엄마잖아요.”하기도 하지만 금방 가상 세계로 다시 돌아온다. 나는 내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머니의 목소리에 담아 건넸다. “그레이스는 정말 대단한 아이란다. 마음먹은 건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마치 진짜 그레이스 할머니를 만난 것처럼 진지했다.

그레이스를 놀렸던 친구에게 질문하기


   그레이스를 놀렸던 친구들에게는 “왜 그레이스가 여자라서 피터팬을 못한다고 그랬어? 여자도 피터팬 할 수 있잖아.”, “흑인이라서 안 된다고 한 건 왜 그랬어?”라고 물었다. 역할을 맡은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대답을 해주었는데, 어려운 질문이라 생각될 때는 내가 그 역할을 맡아 대답을 해주었다. 아이들은 금세 인물에게 감정 이입해서 묻고 대답했다. 역할을 맡은 아이는 “그레이스가 멋지게 연기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 그레이스한테 미안했어.” 했다. 한참 진행하다 보니 아이들이 마법의 의자 바로 앞까지 우르르 나와 앉아 있었다. 더 잘 들으려고 자꾸 앞으로 나온 거다.


   이어서 정지동작 만들기(얼음 조각 만들기)를 했다. 이야기 속 장면을 아이들이 직접 몸으로 표현해 보는 거다. 《책 읽는 도토리》아이들은 이 활동을 참 좋아했다. 5학년이 되어 저희들끼리 발제, 진행을 할 때도 이 활동을 넣었을 정도다. 그레이스가 피터팬 연기 심사를 보는 장면과 피터팬 공연을 멋지게 마치고 난 장면, 책에는 없는 뒷이야기를 상상해서 표현하기를 해봤다. 아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누가 어떤 역할을 할지, 각자 어디에 서서 표현할지 정했다.  서로 중요한 역할을 맡겠다고,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다투지 않았다. 자기가 표현한 인물이 그 상황에서 할 법한 생각이나 느낌을 간단히 말로 해보기도 했다. 마치 자신이 그레이스가 된 듯, 그레이스를 바라보는 친구가 된 듯 생각하고 느꼈다.

그레이스가 피터팬 연기를 멋지게 해내는 장면


엄마가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

    

    마지막으로 아이들과 빈 의자 주변으로 빙 둘러섰다. 빈 의자에 그레이스가 앉아 있다고 생각하고 한 마디씩 해보기로 했다. 아이들은 그레이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을까. “넌 정말 멋져!”, “마음먹은 일을 해내서 참 잘했어!”라고 아이들은 그레이스가 자신의 친구인양 말을 건넸다. 글로 쓰고 확인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이야기를 잘 이해했고, 그레이스의 마음을 잘 읽어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날은 몸으로 실컷 책을 읽었다. 책 모임 아이들의 얼굴에 그레이스를 닮은 표정이 피어났다. 마음껏 자신의 꿈을 펼친 아이의 행복한 미소였다. 그 속에 내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 속을 즐겁게 노닐었다.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새겼다. 그레이스의 용기를 몸으로 느꼈다.


   책 모임하고 집에 돌아와 아이는 피곤한 얼굴로 퇴근하는 아빠를 맞이한다. 아빠의 다리에 매달려 해맑게 말한다. “아빠, 아빠는 마음먹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알았죠?”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나 혼자 씩 웃었다. 나는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생기면, 그런 말이나 그림이 담긴 책을 책 모임 책으로 고른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아이는 그 말을, 그림을 기억한다. 모임 날 친구들과 자신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도 함께 떠올린다. 친구들과 모임에서 깊이 읽으면, 그 말과 그림이 아이의 영혼에 새겨지는 것만 같다.


 "딸아,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될 수 있어. 너는 정말 놀라워!"  책 모임마다 나는 아이에게 말을 건넨다. 책에 담아서, 질문에 담아서, 친구들의 웃음소리에 담아서... 엄마라서 해주고 싶은 말, 엄마라서 해줘야 하는 말들을 그렇게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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