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모임 초기에 아이들이 ‘책 모임에 가면 즐겁다’는 생각을 갖게 하려 애썼다. 재미있게 읽을 책을 골랐고, 놀이에 가까운 독후활동을 준비했다. 책 모임이 끝나면 아이들끼리 놀이하도록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의 바람대로 아이들은 책 모임 가는 걸 좋아하게 됐다. 신나는 활동을 하고,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니 모임 가는 날을 기다렸다. 책 모임을 좋아하니 책도 알아서 잘 읽었다. “모임에서 멋지게 이야기하려면 두 번은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면 “아, 맞다!”하며 여러 번 다시 읽었다. 아이는 다른 친구들이 하지 않는 ‘책 모임’을 한다고, 친구들에게 자랑했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아이를 보며 나도 덩달아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책 모임에서는 처음 입학한 아이들이 편안하게 또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책도 많이 읽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하지만 아이 책 모임에서 '즐거움'만 추구하다 보면 '친구들과 노는 모임'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어렵게 시작한 책 모임이 단순한 사교 모임에 머무른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가벼운 말과 장난이 모임을 채우면 정작 책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책을 읽는 모임인지 놀기 위한 모임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시작부터 ‘책 읽기’와 ‘책 대화'를 위한 모임이란 걸 분명히 해야 한다. 책 모임은 사적인 모임보다는 공적인 모임에 가깝다. 엄마들끼리도, 아이들끼리도 의식적으로 거리 두기를 해야 한다. 오래 만나면 자연스레 마음이 가고, 서로 정이 쌓인다. 하지만 ‘우리는 친구', '우리 사이에 왜 이래.’가 되면 책 읽기도, 모임도 오래 할 수 없다. 사적인 대화가 모임을 삼키고, 규칙이 지켜지지 않아 모임이 느슨해진다. 엄마들끼리, 아이들끼리 적당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서로 너무 편해지지 않도록 일부러 마음의 거리를 두자는 의미다.
책 모임도 거리두기가 필요해요.
먼저, 엄마부터 거리두기 해야 한다. 적어도 책 모임 할 때만큼은 서로 처음 만난 사이처럼 대해야 한다. 또래 아이를 가진, 친한 이웃이 있으면 모임 꾸리기가 수월한 건 사실이다. 든든한 지원군이 있으니 모임을 오래 하는데도 큰 힘이 된다. 하지만 책 모임에서는 되도록 친분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개인적인 관계가 지나치게 드러나면 책 모임은 금세 사교 모임으로 변한다. 아이들을 위해 애써 마련한 자리인데 가벼운 수다가 난무한다면 아쉽다. 책 모임에서는 사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미리 약속하면 좋다. 처음 만난 사이처럼 깍듯하게 서로를 대해야 한다. 서로 존대하며 조심스럽게 이야기 나누려 애쓰자. 그래야 책 선정이나 모임 운영 방법을 정할 때 개인적인 관계를 신경 쓰지 않고 대화할 수 있다. '이런 말을 하면 OO가 속상해하지 않을까?'하고 걱정하면 모임 하기 어렵다.
아이들의 거리두기는 어떻게 해야 할까?아이가 책 모임을 중요하게 생각하도록 하는 게 제일 먼저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한다. 책 모임 하는데도 딱 들어맞는 말이다. 책 모임을 대하는 엄마의 태도를 보며 아이는 책 모임의 중요도를 판단한다. 엄마가 책 모임 날을 달력에 표시하고, 읽을 책을 서둘러 준비하면 아이는 ‘아, 책 모임은 중요한 거구나.’하고 받아들인다. “학원 가야 하니까 책 모임은 쉬어.”하면 ‘아, 책 모임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구나.’한다. 이 아이가 책을 열심히 읽을 리 없다. 책 모임에서 잘 말하고 들을 리 없다. 그러니 일부러라도 아이 앞에서 책 모임을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어렵고 중요한 사람과의 약속 이기라도 하듯 책 모임 약속을 꼭 지키자. 모두가 애쓰며 준비하는 모임이고, 좋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귀한 시간을 낸 자리임을 아이가 알아야 한다. 책 읽을 시간을 넉넉하게 마련해주고, 엄마도 아이와 함께 읽자. 책 모임 진행하는 날은 곱게 단장도 하자. 아이는 엄마를 보며 책을, 책 친구를 대하는 태도를 배운다.
책 모임은 책 읽는 모임!
다음으로 책 모임을 '친구 만나 노는 모임'이라 생각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임 시작부터 ‘책 읽는 모임’이란 걸 분명하게 해야 한다. 모임을 하려면 정해진 책을 꼭 읽어야 한다는 약속부터 한다. 특히 모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아이가 책을 반드시 읽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아이가 어리다면 엄마가 매일 조금씩 읽어주면 좋다. 발제문을 미리 받았다면 아이와 미리 이야기 나눠볼 수도 있다. 아이는 엄마와 나눈 이야기를 기억했다가 모임에서 다듬어 말하기도 한다. 큰 아이라면 매일 읽을 분량을 나눠 포스트잇으로 표시할 수 있게 도와주면 된다. 아이가 제법 자랐더라도 책 읽기를 힘들어한다면 부모가 함께 읽기를 권한다. 매일 조금씩만 읽고, 잠깐 이야기를 나눠보면 아이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아이도 말을 하면서 제 생각을 정리한다. 처음에는 이 모든 일이 힘들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책 모임을 여러 해 하면 아이가 조금씩 제 힘으로, 스스로 하는 것이 늘어난다. 여유를 갖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해보면 된다.
근사한 책 모임이 되기 위해서는 모임 이름 정하기, 함께 지킬 약속 정하기가 필수다. 모임 이름은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정하면 된다. 아이들이 원하는 모임의 모습을 담아내는 이름이면 무엇이든 좋다. 다음으로 모임 규칙을 함께 정한다. 모임에서 지켜야 할 것을 각자 몇 가지씩 제안한다. 그중에서 여럿이 공감한 것을 추려 책 모임 규칙을 만든다. 《책 읽는 도토리》에서는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책은 꼭 읽어오기, 친구 이야기 경청하기, 서로 다른 의견 존중하기 등을 정했다. 정한 약속을 각자 공책에 옮겨 적으며 마음에 새겼다. 따로 정리하지 않았지만 책 모임 결석 시 미리 알리기, 모임 시간 잘 지키기, 모임 후 소감 써서 밴드에 올리기 등도 중요한 약속이었다. 《책 읽는 도토리》는 4년 후 아이들끼리 활동하게 되는데, 이때도 가장 먼저 한 일이 약속 정하기였다. 약속을 정하면 모임 운영에 나의 책임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적당한 거리에서 존중하는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가 마련된다.
책 모임, 아슬아슬 하지만 즐거운 줄타기
《책 읽는 도토리》를 시작할 때 마음 넉넉한 이웃이 집을 내어줬다. 덕분에 따뜻하고 안전한 장소에서 모임 할 수 있었다. 모임 날에는 엄마들이 알아서 간식을 챙겼다. 미처 챙기지 못하면 집주인이 냉장고를 털어 간식을 차려냈다. 누가 더 하고, 누가 덜했는지 따져 묻지 않았다. 엄마들은 '내 아이만'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을 챙겼다. 다시 떠올려봐도 참으로 감사한 인연이다. 하지만 책 모임을 오래 하려면 '마음 가는 대로', '알아서' 계속할 수는 없다. 시간이든 돈이든 노력이든 되도록 함께 부담해야 한다. 모임 한 지 1년쯤 지나 일단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가까운 도서관에 독서동아리로 등록하고, 강의실을 빌렸다. 발제·진행하는 순서와는 별개로 간식을 준비하는 순서도 정했다. 혹시나 특별한 이벤트를 하게 되면 적은 비용이 들었더라도 정확하게 나눠냈다.
사실 엄마와 아이 여럿이 모이는 모임이 완벽하게 공적인 모임이 되긴 어렵다. '책 모임은 공적인 모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사적인 모임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애쓰라는 의미다. 모임을 하면 엄마들끼리도 아이들끼리도 친해진다. 엄마들은 내 아이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도 아끼며 돌본다. 아이들은 모임 친구들을 특별하게 여기며 좋아한다. 이런 만남의 즐거움을 책 읽기의 힘으로 가져가려면 , 만남의 형식과 약속을 정해 지키려 애쓸 필요가 있다.《 책 읽는 도토리》역시 사적 모임과 공적 모임 사이에서 부침을 거듭했고, 감사히도 아직 건재하다. 덕분에 내 아이는 지루하고 힘든 책 읽기를 잘도 견뎌냈다. 책 좋아하는 아이, 책 대화를 잘하는 아이로 자랐다. 아이는 책 나라 여행이 얼마나 즐거운지 알고, 그 여행을 끝내면 자신이 부쩍 자란다는 것도 안다. 나는 함께 책을 읽어준 도토리 친구들이 너무 고맙다. 아이가 "나는 책이 좋아요."라고 할 때는 "나는 책 모임 친구들과 읽은 책이 좋아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아이 책 모임을 처음 할 때 아이는 그저 사람을 좋아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책 모임 안에서 다양한 생각을 접하며 조금씩 성장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친구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운 시선을 얻는다. 함께 책을 읽고 나누는 친구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는 걸 안다. 더 잘 읽고, 더 잘 말하고, 더 잘 듣고 싶어 한다. 내 아이가 책 모임에서 이렇게 성장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사적인 만남과 공적인 만남 사이에서 줄 타기를 해야 하는 아이 책모임. 아차 하면 한쪽으로 힘이 쏠려 모든 게 엉망이 된다. 아슬아슬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이다. 이런 순간은 자주 찾아온다. 그럴 때면 "괜한 일을 벌였어, 그만 둘 거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친구들 덕분에 내 아이가 자란다. 아이는 책 나라 여행을 언제든, 흔쾌히 떠난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흥이 잔뜩 올라 다시 줄을 계속 탈 수밖에 없다. 매력만점 아이 책 모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