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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정 Oct 11. 2020

13. 쓰라린 실패 <파브르 식물 이야기>

- 책 모임 《책 읽는 도토리》이야기

조금 더 어려운 책, 조금 더 폼나는 책


 책 모임을 2년 반 정도 하고, 아이들이 4학년이 되는 해였다. 그동안 아이들은 《책 읽는 도토리》에서 다양한 주제의 그림책을 읽었고, 제법 글밥이 많은 창작 동화도 읽었다. 혼자서는 잘 읽지 않는 동시집이나 지식책도 함께 읽었다. 아이들은 책 모임의 형식에 완전히 적응해서 책에 대해 말하고 듣는 데 능숙해졌다. 책을 멀리하던 아이는 책을 스스로 읽게 됐고, 자기표현이 서툴던 아이는 또박또박 제 생각을 잘 말하게 됐다. 엄마들도 각자의 취향을 살려 발제와 진행을 편안하게 할 수 있었다. 이제 아이들을 즐겁게 만들어 줄 활동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차분하게 질문만 던져도 아이들은 집중해서 이야기를 잘 나눴기 때문이다.


  책 모임 하는 일이 '당연히', '계속' 하는 일이 되니 모든 게 편안해졌다. 정해진대로, 해오던 대로 계속하면 됐다. 그런데 모임이 잘 되니 내 안에 욕심이 스멀스멀 일어났다. 조금 더 어려운 책, 조금 더 폼나는 책을 함께 읽고 싶었다. 그때 눈에 띈 책이 <파브르 식물 이야기>였다. 이 책은 장 앙리 파브르가 지은 책으로 '식물 이야기의 바이블'이라 불린다. 식물의 일생을 관찰하며 인간 삶을 통찰하는 문장이 가득하다. 번역도 매끄럽게 잘 되었고, 이제호 작가가 그린 식물 세밀화도 글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아이들 손에 딱 잡히는 크기, 단단한 양장 표지는 너무나 근사하다. 초록 잎이 한가득 그려진 표지 그림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파브르 식물 이야기(장 앙리 파브르/ 사계절)
우리 아이는 요즘 파브르 식물 이야기 읽어요!


   때마침 4학년이 될 아이들이 과학 식물 단원을 공부하는데도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 드니 마음이 급해졌다. '식물이 태어나는 곳, 눈', '잠자는 식물들', '식물의 놀라운 변신' 등 각 장의 제목만 봐도, 이 책을 읽으면 우리 아이가 똑똑해질 것만 같다. 어서 빨리 읽어야 했다. 함께 읽자 제안하니 엄마들은 좋아했다. 엄마 마음은 다 비슷하니까. 좋은 책이라니 아이에게 읽히고 싶어 했다. 일주일에 2장씩 읽고, 두 달에 걸쳐 다 읽는 걸로 계획을 세웠다. 뭔가 대단한 일을 시작하는 듯이 설레었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 아이는 요즘 파브르 식물 이야기를 읽어요."하고 자랑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낯 부끄러운 일이다.  


  엄마들은 맡은 장에 대해서는 꼼꼼하게 읽고, 질문을 만들며 관련된 활동을 정성껏 준비했다. 집에서는 아이들이 정해진 부분을 잘 읽도록 챙겼다. 책 모임에서는 단 1초도 허투루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책 보며 빈칸에 알맞은 낱말 써넣기, 마인드 맵으로 내용 정리하기, 직접 겨울눈 관찰하기, 잎맥 탁본 뜨기 등. 아이들이 읽은 내용을 정리하게 하고, 책에서 읽은 것을 되도록 직접 해볼 수 있게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책 모임은 점차 지루한 과학 수업으로 변해갔다. 책 내용을 이해시키는데 신경을 더 써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이 의견을 주고받는 소리가 줄고, 진행자의 설명이 늘었다. 일방적인 안내와 지시로 모임을 해나갔다.


"계속 읽어야 할까요?"

  

  "계속 읽어야 할까요?"

  책을 반도 읽지 못했는데, 나는 책 모임 밴드에 글을 올렸다. 책 모임 하는 아이들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책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를 얘기하며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던 아이 모습, 자기 생각을 말하고 싶어서 엉덩이를 들썩 거리던 모습, 친구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내가 책을 읽자 제안했으니 그만 읽자고 해야 했다. 하지만 엄마들은 "그래도 시작했으니 몇 번 더 해보자, 계속해보자." 했다. 어른 책 모임에서도 함께 읽기 시작한 책을 중간에 덮는 건 쉽지 않다. 어렵고 힘든 책을 만날 때마다 책을 덮는다면 끝까지 읽어내는 힘을 키울 수 없다. 또 누군가는 그 책을 의미 있게 읽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그러니 나 역시 쉽게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억지로라도 읽으면, 끝까지 읽어내면 우리 아이에게 뭐라도 남겠지 하는 생각도 자꾸 들었다. 결국 모임에서 책을 끝까지 읽기로 했고, 나는 혼자 읽지 못하는 아이를 위해 매일 책을 읽어줬다.


  "아, 어렵네요."

 책을 읽는 두 달 내내 엄마들은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에게 잎의 구조를 설명하고, 식물 줄기의 특징과 뿌리의 종류를 알려주는 게 쉬울 리 없다. 발제문에서는 아이들의 생각과 감정을 묻는 질문이 줄어들고, 과학적 지식을 정리하는 문제가 늘었다. 아이들이 이해하게 하려다 보니 진행자의 설명이 길어졌다. 아이들의 말이 사라졌다. 서로 이야기하고 싶어 안달하던 아이들이었는데, 눈을 반짝이면서 엄마를 쳐다보던 아이들이었는데.... 아이들의 호기심을 끌어내고, 책 읽는 재미를 알게 해줘야 했다. 무엇이든 해봐야 했다.


 ‘제11장 식물의 놀라운 변신’에서는 환경에 적응하느라 잎을 변화시킨 식물이 나온다. 잎이 변신한 모양에 따라 덩굴손, 꽃턱잎, 벌레 잡는 잎, 가시로 분류한다. 모양이 특별한 식물이라 아이가 실제로 보고 싶어 했다. 마침 내가 진행이라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네펜데스와 파리지옥을 주문했다. 모임 날 아침까지도 택배가 오지 않아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모임 시간에 가까스로 맞춰 택배가 왔고, 허겁지겁 달려 모임 장소인 도서관으로 갔다. 일단 실제 식물을 가지고 활동하니 아이들이 좋아했다. 잎을 자세히 관찰하여 그리고, 관찰한 내용도 글로 적었다. 저희들끼리 한참을 이야기 나누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모든 책모임을 이렇게 진행할 수는 없었다. 하필 책 읽을 때가 추운 겨울이었고, 책에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식물도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파브르 식물 이야기>는 분명 좋은 책이다.

  

  어디서 들었을까. 어떤 목록에서 보았을까. 나는 <파브르 식물 이야기>가 좋은 책이며, 언젠가 아이가 꼭 읽어야 할 책이라 생각했다. 이제 와서야 고백하건대, 나는 이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 좋다는 얘기만 듣고, 다른 엄마들에게 함께 읽자고 제안했다. 인터넷 서점에서 책 정보만 확인해봤어도 이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이 책은 청소년 도서로 분류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 소개에서도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식물에 관심 갖기 시작한 어른을 위한 입문용’이라 밝힌다. 아이에게 좀 더 폼 나는 책을 읽히고 싶다는 욕심이 내 눈을 멀게 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지, 아이가 즐기며 읽을 수 있는지 살피지 않았다. 무엇보다 ‘꼭 지금 읽어야 하는 책’인지 따져 묻지 않는 게 큰 잘못이다.


  <파브르 식물 이야기>는 분명 좋은 책이다. 교양인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식물 지식을 총망라한다. 삶의 지혜를 담아낸 문장들은 정말 아름답다. 모든 문장에 밑줄 긋고, 공책에 옮겨 적으며 마음에 새기고 싶을 정도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담아낸 좋은 책이다. 식물의 생김새와 구조를 따뜻한 색감으로 자세히 그려낸 그림도 훌륭하다. 그림을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하지만 10살 아이가 읽기에는 너무 어렵다. 삶의 경험이 적은 아이들이 이 책으로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 아이들에게는 그저 이해하고 외워야 할 지식더미로 느껴질 뿐이다. 이후에도 아이들은 ‘파브르’라는 말만 들으면 진저리를 쳤다. 좋은 책이니 다시 읽어보자는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힘들게 끝까지 읽었으나 완독의 기쁨도, 읽는 재미도 남지 않았다.


책은 재미있는데, 책모임은 재미없었어요.

  

  이제 13살이 된 둘째 아이에게 <파브르 식물 이야기>가 어땠냐고 물었다. 그러자 뜻밖의 말이 돌아온다.

 “책은 재미있는데, 책모임은 재미없었어요. 책모임 할 만한 게 없어요. 너무 과학이에요.”

아, 역시 엄마가 문제였다. ‘너무 과학’인 책, 지식이 가득한 책이다. 책 내용을 아이들에게 이해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말하게 돕기보다 개념과 원리를 가르치려고 했다. 아이들이 삶을 통찰하며 파브르의 문장을 이해하길 바랐다면 더 문제다. 내 아이의 삶을 들여다보지 않고, 엄마의 욕심을 내세워 책을 골랐다. 덕분에 <파브르 식물 이야기>는 아이들이 다시 읽기 싫다는 책이 됐다. 완전한 실패다.


  책은 엄마가 반드시 먼저 읽어야 한다. 아이 눈높이에서 책을 골라야 한다. 아이가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아이의 경험과 맞닿은 이야기여야 한다. 나는 지금도 불쑥 어려운 책, 폼 나는 책을 읽게 하고픈 욕심이 생기면 이때의 실패를 되돌아본다. 얼굴을 찡그리고, 고개를 젓는 아이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묻는다. “이 책은 어때?”, “너는 어떤 책을 읽고 싶니?”라고. <파브르 식물 이야기>는 초등학교 5~6학년 아이들이라면 잘 읽을 수 있다. 최근 5학년 교과서에 일부가 수록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때도 지식에 집중하면 안 된다. 제목처럼 식물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식물이란 존재를 알아가며, 책 속에 가득한 아름다운 문장과 생각들을 찾아보면 좋겠다. 나도 둘째 아이와 이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 하루 한 장씩 소리 내어 읽고, 마음에 와 닿은 문장만 나눠도 좋을 것이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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