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어릴 때 부모에게 의지해서 해결하던 일을 하나씩 혼자, 제 힘으로 해내면서 성장한다. 처음에는 부모가 하는 것을 따라 하지만 점차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간다. 책 모임 역시 그렇다. 모임을 시작할 때는 어른의 도움이 필요하다. 일단 아이들에게 책 모임 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고, 책 읽고 이야기 나눌 시간을 넉넉하게 주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여럿이 모여 책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그것이 꽤 재미나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어떤 책을 읽고, 어떻게 이야기 나누면 좋은지 시범 보여줄 수 있다면 더 좋겠다. 그렇다면 어른의 도움 없이 아이들끼리 하는 것은 언제 가능할까? 아이의 성향, 독서 경험, 가정의 분위기 등에 따라 다를 것이다. 여기서는 나의 경험에 기초해서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확실한 정답은 아니지만 아이 책 모임을 해보려는 사람들에게 참고가 될 거라 생각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이가 어릴수록 어른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모임 진행뿐만 아니라 모임에서 생기는 소소한 갈등도 해결해야 하는데 어린 아이들이 스스로 처리하기 힘들다. 이래저래 신경 써야 할 것이 많고, 손이 많이 간다. 대신 아이들이 금방 책 모임의 재미에 폭 빠지고, 읽고 나누는 일을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책 모임 시작 나이는 어릴수록 좋다. 어린 아이들은 스펀지처럼 책 모임이 주는 영양분을 쏙쏙 빨아들인다. 부모는 아이가 책을 자연스럽게 꺼내 읽고, 제 생각을 잘 정리해서 말하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아이와 함께 책 모임 준비를 하면서 소소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런 순간들이 따스한 추억으로 남는다.
물론 모임을 만들고, 꾸려가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 아이와 함께 책을 읽어야 하고, 모임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야 한다. 모임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신경 쓰인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이야기를 잘 나누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좋은 질문을 던지며 진행하는 일이 큰 부담이다. 하지만 부모의 수고가 우리 아이를 책 좋아하는 아이, 타인과 깊게 소통할 줄 아는 아이로 키운다. 이런 아이의 성장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어 더 좋다. 독서논술학원에 아이를 맡겨서는 얻기 힘든 열매다. 다행히도 아이가 자라면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둘 늘어난다. “내가 해볼래요.”하며 읽을 책을 함께 고르고, 모임에서 나눌 질문 몇 가지를 스스로 만들기도 한다.
내 경험상 초등학교 4학년 정도 되면 아이가 책 모임을 진행할 수 있다. 책 모임 경력이 있다면 어른이 해오던 책 선정이나 질문 만들기 등을 흉내 내며 금방 모임 진행법을 익힌다. 조금씩 책 모임에서 아이들이 결정할 일과 할 일들을 늘려주면 된다. 책 모임을 오래 하면 아이들이 책 모임의 절차나 방법, 주의사항을 잘 알기 때문에 아이들끼리 모임 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책 읽는 도토리》에서 했던 것처럼 아이들끼리 모임 하기 전에 일정 기간 과도기를 두는 것도 좋다. 질문 만들기, 질문 정리해서 발제문으로 정리하기, 책 모임 진행 시 주의할 점 등을 한 번 짚어주면 도움이 된다. 이후에는 아이들끼리 모임 하느라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 어른들은 곁에서 최소한의 도움만 주면 된다.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은 모임 진행 방법을 금방 익힌다. 나는 해마다 맡은 반 아이들과 교실에서 책 모임을 운영한다. 고학년의 경우 주 1회 2개월 정도 꾸준히 모임 하면 아이들이 책 모임의 틀을 어느 정도 익혔다. 5~6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책 모임을 만들고, 모임마다 이끔이를 두어 동시에 여러 개의 책 모임을 진행했다. 이끔이의 자질에 따라 모임의 질이 달라졌지만 큰 무리 없이 책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큰 아이 책 모임《스페이스》도 초등 5학년 여자 아이 넷이서 2년 가까이 저희들끼리 운영했다. 2개월 정도 모임 진행법을 익히고, 돌아가며 발제․진행을 맡아 알차게 모임을 잘했다.
고학년 책 모임을 할 때 가장 고민되는 일은 ‘아이를 어떻게 책 모임으로 초대하는가?’ 일 것이다. 책을 잘 읽지 않고, 대화 나누는 걸 좋아하지 않는 아이라면 더욱 힘들다. 아이에게 친한 친구가 있다면 친구 찬스를 이용하면 좀 수월하다. 친구의 부모님과 연락해서 친구가 책을 함께 읽을 수 있도록 한다. 정해진 책을 구해서 읽고, 약속한 날에 아이를 보내주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 대부분 흔쾌히 응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좋아하는 친구를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흥미로워한다. 고학년 담임을 할 때 신청자를 받아 방과 후 책 모임을 했는데, 아이들의 신청 이유가 대부분 ‘친구가 가자고 해서’였다. 학년 전체 아이들을 대상으로 신청을 받았지만 과반수 이상이 우리 반 아이들이었다. 내가 “○○도 한다더라.”,“그냥 친구들 이야기 듣고만 있어도 돼.”,“맛있는 거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거야.”하고 바람 잡기를 잘 한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이들을 책 모임에 초대하는 일에 성공하면, 막상 모임을 진행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책 모임 경험이 있는 아이라면 전혀 모르는 친구들과 모임 하는 것을 즐기기도 한다. 자신과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는 재미를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께 책 읽을 친구를 구했다면 뭔가 특별하고, 재미난 일을 벌이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면 좋다. 집의 특정 공간을 책 모임 장소로 꾸미거나 아예 평소 가보지 못했던 예쁜 카페를 책 모임 장소로 정한다. 카페의 경우 소음이 있기 때문에 가까운 도서관에 동아리 신청을 해서 대여 공간을 이용해도 된다. 첫 번째 모임 날에는 맛있는 간식과 보드게임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잔뜩 준비한다. 상황이 된다면 모임 후 영화 관람하기, 만화카페 가기, 함께 운동하기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활동을 해도 좋다. 아이들의 마음을 얻고, 모임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 애를 좀 써보는 거다. 친구들과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 아이에게 물어보고 준비한다. 우리 아이가 활발하고 적극적인 성격이라면 아이가 직접 첫 모임을 이끌어도 좋겠다.
책 모임을 처음 할 때는 읽기에 쉽고, 아이들이 할 말이 많은 책을 고른다. 대화 나누는 게 익숙해질 때까지 글이 적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은 그림책을 읽어도 좋다. 아이들이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제 생각을 편히 이야기할 수 있는 책이면 뭐든 좋다. 나의 경우에는 아이들 또래가 주인공이고, 아이들이 가정이나 학교에서 겪을 법한 일 다룬 생활동화나 마음껏 상상하며 읽을 수 있는 판타지 동화가 좋았다. 일단 아이들이 ‘책 읽고 정해진 날에 모인다’는 약속을 지켜주면, 책 모임 해나가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2~3회 정도 어른이 책 모임을 이끌며 책 모임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는지, 진행을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완벽게 본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은 갖지 말자. 내가 만난 아이들 대부분이 편안한 자리만 마련되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친구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아이들에게 정성껏 질문하고, 잘 들어주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고학년 아이들을 책 모임에 초대했다면 일단 성공이다. 이제 세부적인 진행 방법을 익히게 도우면 된다. 하지만 부모가 책 모임 경험이 없고, 평소 아이들과 책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면 아이들을 돕기 어려울 거다. 이럴 때는 간단한 진행 도구를 활용할 수 있다. 사실 아직까지 아이 책 모임에 참고할 책이나 자료가 많지는 않다. 앞으로 누구나 더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자료가 많이 개발되면 좋겠다. 여기서는 내가 큰 아이 책 모임 할 때 아이들이 책 이야기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돕는데 참고했던 책과 어설프게 만들어 활용했던 자료를 소개한다.
독서교육 전문가 김은하가 쓴 쉽고 알찬 독서동아리 매뉴얼이다. 독서동아리가 무엇인지부터 독서동아리의 종류와 운영 방법까지 정리해두었다. 독서동아리의 이론과 실제를 핵심 내용만 집약해서 정리한 책이다. 특히 독서동아리에서 당장 활용할 수 있는 양식을 실어두어 큰 도움이 된다. 아이 책 모임 할 때 이 책에 실린 양식을 활용하면 막막함이 덜하다. 단, 이 책의 내용을 '꼭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책 모임은 자유롭고 편안해야 한다. 강요나 강압이 있으면 안 된다. 우리 아이에게, 우리 아이 책 모임에 필요한 부분만 취하고, 언제든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마음을 갖자.
나는 고학년 아이들과 모임 할 때 이 책에 실린 질문을 참고해서, 이야기 카드를 만들었다. 인물, 사건, 배경, 작가 등을 살펴보는 질문과 아이들의 생각이나 느낌을 물어보는 질문을 카드 형태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색지에 손글씨로 질문을 써서 붙였고, 시간이 좀 지나서는 인쇄해서 붙였다. 모임 할 때 아이마다 나누고 싶은 질문 카드 2개씩을 고르고, 그 질문으로만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았다. 독서감상문을 쓸 때도 마음에 드는 질문 카드를 고르고, 순서를 정한 뒤 보며 글을 써보기도 했다. 처음 모임 하고, 글을 쓸 때 유용했던 기억이 난다.
진행자 아이를 위해서 진행 달력을 만들어 사용해보기도 했다. 낡은 탁상 달력에 진행 순서를 써 붙여서, 진행자가 넘겨가며 보고 진행할 수 있도록 한 거다. 절대 멋지고 대단하게 꾸민 게 아니다. 책 모임 시작하는 말하기, OX 퀴즈 하기, 별점 주고 소감 말하기, 가장 인상 깊은 장면 말하기 등을 하얀 종이에 매직으로 쓱쓱 써서 붙였다. 최근에는 독서 질문카드(수업디자인연구소)나 독서토론 카드(학토재) 등을 구입할 수도 있다. 다만, 이렇게 정해진 질문만으로는 아이들의 관심사와 욕구를 꺼내어 나누기 어렵고, 주제를 깊숙이 다룰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책 모임 햇수가 늘수록 ‘우리만의 질문’을 찾는 일이 중요해진다. 책 대화 나누는 일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다음에는 ‘우리의 질문’도 마련해서,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
아이들끼리 책 모임을 하면 자유롭고 즐겁게 읽는다. 아이는 “오늘은 ○○이가 꽤 근사한 이야기를 했어요.”, “○○가 이젠 책을 잘 읽어요.”하며 밝은 표정으로 책 모임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했다. 반면 아이들 사이에 갈등도 자주 생긴다. 집에 온 아이가 “○○이가 책을 잘 안 읽었는지, 과자만 먹고 얘기를 안 해서 짜증 났어요.”, “○○가 자꾸 딴소리를 해서 속상해요.”하며 씩씩대며 갈등 장면을 얘기한 날도 많다. 책 모임이 잘 된 날은 아이 얼굴에 기쁨과 뿌듯함이, 책 모임이 잘 되지 않은 날은 짜증과 속상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책 모임은 계속한다.’는 생각으로 책 모임은 쉬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고, 자기들만의 색깔로 모임을 만들어갔다. 우리 아이는 잠시도 책 읽고, 이야기 나누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는 좌충우돌하며, 시행착오를 겪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힘으로 우뚝 섰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여기서 말한 내용은 순전히 나의 경험을 정리한 것이다. 이것 말고도 더 좋은 방법이 많이 있을 거다. 어떤 방법을 활용하느냐 보다 아이의 성장을 돕겠다는 마음과 의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구든 아이 책 모임을 잘 이끌 수 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너무 완벽하려는 욕심을 내려놓는다면 아이 책 모임을 통해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매일 아이의 생각과 마음이 자라는 걸 볼 수 있다는 건 부모에게 큰 기쁨이다. 일단 아이 책 모임을 시작하고, 어떻게 해나갈지는 나중에 고민하자. 그래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