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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정 Sep 23. 2020

06. 엄마가 가진 가장 큰 재능, 사랑

책 모임 ≪책 읽는 도토리≫ 이야기

   넉 점 반, 함께 읽기

   윤석중의 <넉 점 반>으로 책 모임 하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새로 모임에 들어온 친구 엄마가 처음 진행하는 날이었다. 거실 낮은 탁자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6명의 아이들. 초등학교 2학년 여자 아이 다섯에 남자아이 하나였다. 탁자 위에는 아이들이 챙겨 온 넉점반 책 6권과 발제문, 꿀떡 한 접시와 잘 깎은 사과 한 접시가 놓여 있다. 아이들의 작은 머리통은 일제히 책 읽어 주는 엄마를 향해 있다. 나는 이 모습을 참 감동적이고, 따뜻했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시 그림책 <넉 점 반>은 1940년에 쓰인 윤석중의 동시에 이영경이 그림을 그린 책이다. 단발머리 여자 아이가 엄마 심부름을 집을 나온다. 아이는 놀이에 정신이 팔려 마을을 한 바퀴 돌다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온다. 혼자 읽기에는 잔잔하고 좋은 책이지만, 과연 이 책으로 어떻게 여럿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교사인 나도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책에는 가르쳐주어야 할 교훈도 없고, 아이들 마음을 쏙 빼앗을 화려한 장치도 없다. 매일같이 형형색색의 영상과 꽝꽝 울리는 음악을 접하는 아이들이다. 이 책이 어떻게 아이들 마음에 가 닿을 수 있을까.


<넉 점 반> 윤석중 시/ 이영경 그림/창비

  

    그런데 진행을 맡은 엄마는 그저 내 아이에게 읽어주듯, 천천히 따뜻하게 읽어주기만 하였다. 그 목소리가 너무 정겨워 곁에서 듣던 나도 숨죽이고 들었다. 아이들도 그랬다. 우리 아이들은 엄마 목소리를 따라 책 속으로 들어갔다.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 어디론가 떠났던 아이들처럼. 이야기를 놓칠까 봐 집중해서 그림을 살폈다.책 속 여자 아이를 따라 “넉 점 반, 넉 점 반” 외우고, 개미 행렬을 구경했다. 잠자리 따라 한참 돌아다녔다. 아이들은 “얘는 언제 집에 갈 거지?” 하고 걱정하다가도, “저기 고양이 있다!” 하며 그림을 살피기 바쁘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책을 보는 듯하다.


  독서지도 관련 책에서 알려주는 거창한 이론이나 방법이 필요 없었다. 그저 엄마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엄마는 책을 읽어주며 자연스레 자기 아이를 떠올렸을 것이다. 길을 함께 걸을 때 앞만 보고 바쁘게 거는 어른과 달리 아이 발걸음은 늘 더디다. 아이는 작은 개미 한 마리, 작은 들꽃 한 송이, 나뭇잎 끝에 매달린 빗방울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길 위에 올라온 달팽이를 보던 날, 둘째 아이는 “엄마, 달팽이 여기 있으면 밟혀요.” 하며 조심스레 달팽이를 풀숲에 옮겨 놓았다. 그 마음이 예뻐서 내 가슴 한쪽이 한참 얼얼했던 기억이 난다.


  그 날 진행자였던 엄마도 고왔던 자기 아이 마음결을 떠올리며 읽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넉 점 반>을 그리도 따스하게, 깊게 읽어 줄 수 없다. 아이 마음결을 내 것처럼 온 힘을 기울여 살피는 사람. 그게 엄마다. 그런 엄마가 읽어주는 책은 특별하다. 아이들은 엄마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천천히 읽어주는 이야기에 금방 폭 빠진다. 책을 다 읽고, 아이들은 작은 평화예술단이 만든 <넉 점 반> 노래를 함께 불렀다. “아기가 아기가 아랫집에 가서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고요~” 아이들은 몸을 들썩이며 불렀다. 참 좋았다.


  책 모임 횟수가 늘어갈수록 엄마들의 진행도 훨씬 매끄러워졌다. “아이코, 저는 잘 못해요.”하던 엄마들이 숨겨둔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각자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책 모임도 매번 다양한 빛깔로 꾸릴 수 있었다. 과학을 좋아하는 엄마는 과학 책을 함께 읽고, 아이들이 간단한 실험을 해볼 수 있게 했다. 취미로 클래식 기타를 배우는 엄마는 아이들과 동요를 책 내용 담은 노랫말로 바꿔 불렀다.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과 간단한 즉흥극 하는 걸 좋아한다. 책 모임에서도 옛이야기나 동화를 읽고 즉흥극, 핫 시팅 등의 연극 활동을 했다.


엄마의 가장 큰 재능, 사랑

   

    엄마가 취미가 있거나 잘하는 것이 있다면 책 모임에서 풍성하게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취미나 특기가 없어도 괜찮다. 엄마의 가장 큰 재능은 ‘사랑’이다. 아이를 향한 깊고 넓은 사랑, 이것만으로도 엄마는 훌륭한 책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엄마는 아이와 눈을 맞추고 아이 감정 읽는 것에 능하며, 아이가 알기 쉽게 말하는 법을 안다. 아이가 어릴 때 책을 읽어준 경험도 많기에 따뜻한 목소리로 책도 잘 읽어준다. ‘전문가처럼 잘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책,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활동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엄마다. 엄마는 이미 독서교육을 잘할 수 있는 기본 자질을 갖추고 있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만으로 모든 걸 해낸다.


  책 모임을 하며 엄마인 내가 많이 변했다. 여러 가지가 변했지만, 무엇보다 큰 변화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조금씩 줄여갔다는 것이다. 아이가 제 이야기를 마음껏 꺼낼 수 있게 하려면 엄마인 내가 말을 줄여야 했다. 엄마가 많은 말을 쏟아낼 때 아이는 입을 다문다. 엄마는 들어야 한다. 아이의 낯빛을 살피고, 아이 목소리에서 미묘한 떨림을 읽어야 한다. 책 모임을 해가며 엄마들은 아이를 위해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 늘 고민한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엄마로서 부족한 모습을 발견하고 인정한다. 이 모든 게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엄마니까, 엄마라서 우리는 아이와 함께 오늘도 조금씩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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