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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정 Oct 02. 2020

09. 아이 속마음 엿보기<눈물바다>

- 책 모임 ≪책 읽는 도토리≫ 이야기

책 읽는 아이들

   낮은 탁자에 다섯 명의 아이들이 모여 앉았다. 한 엄마가 그림책을 펼쳐 보이며 읽어준다. 아이들은 목을 쭉 빼고 본다. 집에서 많이 본 책인데도 모임에서 만나면 더 반가운 모양이다. 작은 그림 하나, 이야기 한 자락 놓칠까 봐 잔뜩 집중한다.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듯 아이들은 책을 향한다. 엄마의 목소리가 낮아지면 아이들은 움직임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흥미진진한 장면이 나오면 곁에 앉은 친구 얼굴을 살폈다. ‘금방 너도 봤어?’하는 표정으로. 그 모습이 나는 참 좋았다. 이 날 함께 읽은 책은 서현의 <눈물바다>이다.

눈물바다(서현/사계절)


   <눈물바다>에 담긴 이야기는 어찌 보면 단순하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아이가 한바탕 울고 난 후에 “아, 시원하다.”한다. 슬픔이란 주제를 유쾌하게 풀어냈다. 글도 적고, 그림도 추상적이지 않아 이해하기 쉽다. 서현 작가는 인물의 개성을 잘 살려 위트 있게 그려낸다. 그림만 봐도 아이들이 좋아한다. 하지만 모임에서 나눌 이야기는 많지 않을 것 같았다. 비교적 안정된 환경에서 자라는 초등 1학년 아이들이 슬픔을 알까, 그림 속 아이처럼 실컷 울고 시원해져 본 경험이 있을까. 아이들이 할 말이 없어 입을 꼭 다물면 어쩌나 싶었다.


   하지만 모임 시작부터 아이들은 할 말이 아주 많았다. 그림을 보며 “우와, 여자 아이 얼굴이 배추야.”, “엄마, 아빠는 공룡이네!” 하며 말을 쏟아냈다. 책 읽어주며 잠시 멈출 때마다 아이들은 “나도 이런 적 있어!”, “나도 어제 울었는데….”했다. 아이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정답을 말해야 한다는 강박이 적고,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덜 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책 모임이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물론 아이들이 제멋대로 이야기하도록 마냥 내버려 두지는 않는다. 진행자가 “자, 이번에는 ○○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말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어요.”하고 규칙을 알려준다.


아이 속마음 엿보기


   책을 다 읽고, “너도 이 아이처럼 어른들께 억울하게 혼나 본 적 있니?”, “눈물바다가 될 만큼 많이 슬펐던 적 있니?”라고 물으니 아이들 말이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 엄마 아빠가 싸우는 모습을 보며 무서웠던 일을 생생하게 떠올리고, 엄마나 선생님한테 억울하게 혼났던 일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 아이들이 할 말이 없으면 어쩌나 생각한 건 기우였다. “엄마는 내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혼내요.”, “엄마도 맨날 까먹으면서 내가 뭘 안 챙기면 막 혼내요.”, “엄마랑 아빠랑 싸워서 TV가 깨졌어요.” 아이들은 꾹꾹 눌러둔 속 얘기를 끝도 없이 꺼내놓았다. 덕분에 지켜보던 엄마들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나 역시 그랬다.


   나는 아이를 반듯하게 키우고 싶었다. ‘교사의 아이’니까 인성도, 생활 태도도 훌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의가 바른 아이, 타인을 배려하는 아이, 정리정돈을 잘하는 아이. 그런 아이로 키우기 위해 나는 엄한 엄마가 됐다. “~해야 해.”, “~하면 안 돼.”라는 말이 늘 앞섰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는 뭘 하고 싶어?”하고 묻지 않았다. 그런데 책 모임에서 아이가 ‘그런 엄마가 무섭다’고, ‘엄마가 자기 얘기는 듣지 않고 혼만 낸다’고 제 속마음을 꺼내놓은 것이다. 순간,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부끄러움은 금방 가라앉았다. 우리 아이가 제 맘을 드러내고는 시원해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나도 그래.”, “맞아, 맞아. 엄마들은 다 그래.”하고 맞장구 쳐주니 아이는 더 신이 났다.


 슬픔이란 감정은 나쁘고, 숨겨야 하는 걸까?

  

   이어서 진행자가 “슬픔이란 감정은 나쁘고, 숨겨야 하는 걸까?” 물으니 아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기만의 방법으로 표현해야 해요.”, “노래를 부르면 돼요.”, “그림을 그려요.”라고 말했다. 어른들도 잘 모르는 걸 아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속상한 마음을 숨기려고 하지 말고, 잘 꺼내어 다독이면 된다 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어떤 엄마였는지 돌아보았다. 나는 ‘아이는 나의 얼굴’이라며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다듬어 키우는데 집중했다. 아이 마음이 어떤지, 아이가 뭘 원하는지 살피지 않았다. 그렇게 키운 내 아이는 남 보기에 예의 바른 아이였다. 하지만 마트에 가서 “엄마, 나 이거 먹고 싶어요.”도 말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엄마 눈치 보느라 잔뜩 움츠린 아이의 어깨가 떠올랐다. 그동안 아이 마음을 살피지 못한 게 너무 미안했다.


   ‘내가 슬플 때 우리 엄마가 어떻게 해주면 좋은가?’라는 질문에 아이들은 “안아주세요.”, “위로해주세요.”, “그냥 혼자 있게 해 주세요.” 했다. 아이마다 원하는 게 달랐다. 아이들은 서로의 이야기에 크게 공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도 그래!” 하며 손뼉을 짝 쳤다. 내 아이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지켜보는 엄마의 존재를 잊은 듯하다. 편안한 표정에 생기가 돈다.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내보이고 친구들에게 수용받는 순간, 아이는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책 모임은 이런 순간을 아이에게 자주 선물해준다. 책 속 인물의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가 되면, 아이는 자기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책에 기대어 자기 마음을 슬쩍 꺼내 보인다. 아이들은 “나도 그래”라는 한 마디로 친구에게 공감한다. “맞아. 그럴 수 있지.”하며 친구의 마음을 알아준다.


     잘 들어주기, 듣고도 모른 척 하기

  

   책 모임은 아이에게 안전하다. 아이가 생각이나 느낌을 꾸미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말해도 된다. 안전하고 따스한 공간이다. 책 모임을 이런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부모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수고를 한다. 아이들의 경험이나 감정과 맞닿아 있는 책을 고르고, 아이들이 할 말이 많은 주제를 정해 질문을 정한다. 편안한 장소와 맛있는 간식을 준비한다. 뿐만 아니라 정해진 책을 빨리 구하는 것, 아이가 읽도록 하는 것, 책 모임에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 있게 하는 것 등 신경 쓸 일이 많다. 이렇게 적어놓으니 뭔가 힘들고 대단한 일인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책 모임은 수고롭고 귀찮은 일이 아니다. 몇 달만 꾸준히 하면 의무감에 하는 일이 아니라 좋아서 하는 일, 자연스러운 일상이 된다.


  그렇지만 부모가 특별히 의식하며, 신경 써서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잘 들어주기’와 ‘들어도 못 들은 척 하기’이다. 부모는 자기 말을 하는데 익숙하다. 아이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의 깊게 듣지 못한다. 책 모임에서는 아이들이 거침없이 말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잘 들어줘야 한다. “아, 그렇게 생각했구나.”하고 공감해주고, “멋진 생각이야.”하고 격려해주자. “○○는 ~하다는 생각이고, ○○는 ~라고 생각했구나.”하고 아이의 말을 정리해주면 더욱 좋다. 때로는 ‘들어도 못 들은 척’ 해야 하는데 이게 참 어렵다. 슬쩍 엿들은 아이 말이 마음에 걸려 따져 묻고 싶어 질 때가 많다. 하지만 꾹 참아야 한다. “너 아까 이런 말 하던데? 왜 그랬어?”하고 묻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기억하자. 아이가 편하게 말하게 해주는 게 제일 중요하다.


아이 속마음 엿보기의 소중함

     

   책 모임이 안전하다 생각되니 아이들이 제 이야기를 마음껏 했다. 진행하지 않는 엄마들은 아이들과 조금 떨어져 앉아서 이야기를 슬쩍 엿들었다. 그러다 엄마도 몰랐던 아이 속마음을 알게 되면 흠칫 놀랐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차츰 익숙해졌다. 우리 아이가 제 생각이나 느낌을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그때 일을 아직도 기억하는 줄 몰랐어요.”, “이렇게라도 아이가 자기 마음을 얘기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했다. 책 모임에서 아이 속마음 엿보기, 내가 아이 책 모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까닭 중 하나이다. 나는 융통성 없고 완고한 엄마였다. 아이 감정 살피기에 무심했다. 그런 내가 책 모임을 통해 아이 마음 엿보며 많이 달라졌다. 아이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알게 됐고, 시시각각 변하는 아이 마음을 더 잘 알고 싶어 졌다. 덕분에 아이와 자주 눈 맞추고, “네 생각은 어때?,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하고 자주 묻는 엄마가 되려 애썼다. (지금도 애쓰고 있고, 더 많이 애써야 한다.)


    <눈물바다>를 읽으며, 아이는 친구들과 ‘슬픔’에 대해 실컷 이야기했다. 초등 1학년 아이들이 느끼는 슬픔은 어떤 것인지, 아이들은 슬픔을 어떻게 달래는지 도란도란 나눴다. 이 책으로 할 이야기가 없을 거라는 내 생각은 틀렸다. 아이 책 모임에 어른이 보기에 그럴싸한 주제나 이야기가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아이들이 제 속마음을 편안하게 꺼내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엄마의 기대에 맞추느라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하는 내 아이에게 이런 책 모임은 더욱 소중하다. 그림책 속 아이는 실컷 울고 “아, 시원해!”했고, 내 아이는 자기 이야기를 실컷 하고는 “아, 시원하다.”했다. 그런 아이를 보며 나는 ‘아이에게도 실컷 울고 싶은 날이 있구나.’ 하고 다시 깨달았다. 책 모임 마치고 아이를 꼭 안아줬다. 다른 날보다 더 힘주어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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