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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보 Nov 24. 2021

계몽 : 啓蒙 : Enlightenment의 함정

[계몽 : 啓蒙 : Enlightenment]의 함정

너 자신을 알라.

고대 철학자의 이 소리를 그대로 미개한 문명인에게 사용했다.

"헉! 나는 미개했구나"

라는 것을 자각시키고 그것을 통해 주변에 존재하는 타인보다 위에 있는 존재로 행사를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계급, 지식층의 보급이 아니라 기초적인 생활여건을 이해할 수 있는 범위로 만들어주고 이용하자는 것이 궁극적인 계몽의 '목적'이다.

근대 계급주의의 타파로 이어진 결과론을 볼 때 이것은 사실 계몽운동과 상관없는 형태로서 뻗어나갔지만 근간에는 사회 계몽보다 이익을 강화하기 수단으로써 이용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쪽은 간단히 말해서 '내 편 만들기 / 내 의견에 동조하는 쪽수 늘리기' 정책이 기본이다.

계몽사상가와 계몽시대의 착각은 그렇게 해서 계몽된, 자신을 알고, 지식을 얻은 이가 꼭 계몽가 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결과였다.

그 덕분에 선진국가와 개발국, 미개국의 차이점을 경제적 여건의 차이가 아니라 자주민들의 계몽 척도를 가지고 분류하는 것은 또 어려운 일이 된다.

주변 사람들보다 먼저 알게 된 지식을 통해 자신의 이익으로만 환원하려는 자들은 끊임없이 등장했고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계몽과 혁명의 깨달음을 통해 앞선 미래를 꿈꾼다고 말하게 된다. 이 부분은 이후 정치적 입지를 가지게 되고 폭력의 정당성, 싸움의 빌미를 거론해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만보 주 ▶▷▶

무지(無知)라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자아를 완성하는 것과 거리가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회적 가치관과 마찬가지로 자아의 형성은 이루어지는 것과 완성하는 것이 다른 것이기 때문이지요. 실제 사회성과 자아를 완성한다는 것은 철학가라고 해도 어려운 일이고, 그 어떤 인류의 미래가 다가온다고 해도 그것이 확실하게 아름다운 결과로 마무리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종교와 정치의 가치관은 철학의 발전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정작 대중의 이해도 차이 때문에 어느 정도 보편성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보편성을 기준으로 다시 계몽되어야 할 가치가 나누어지는데 그 어떤 사회가 가진 가치가 완성된 훌륭한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수많은 나라와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기에 계몽운동은 언제나 사람이 소속된 사회가 요구하는 보편성을 가지고 가치와 기준을 정합니다. 단편적으로 예를 들자면, 동독과 서독, 북한과 남한이라는 형태로 이웃된 민족국가가 가졌던 다른 가치관입니다.

틀림없이 상호 간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목적의식은 같았지만 방향이 달라고, 그 다른 방향이라는 것에 의한 결과가 눈에 보이는 시점에서도 그것을 바꿀 생각을 하지 못 했던 것은 참으로 놀라운 계몽시대의 그림자라고 하겠습니다.

지금은 중동지역과 아프리카 지역에서 벌어지는 여러 게릴라 정부, 반정부, 군사 수립 정부들이 그런 정치적 기반에 계몽의 혜택을 들먹이면서 꿈꾸는 소리를 하는데, 그것이 인터넷이라는 동 시기 지식공유의 발판이 되면서 헛소리 작업이 되는 경우가 많아지니 발전된 미래상을 거론하는 데 있어서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수정된 계몽의식을 펼쳐 내편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게 되고 그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믿게 만들어 약자, 타인을 괴롭히는 데 있어 주저함이 없게 만드는 악의 법칙을 늘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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