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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꼬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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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칩코 May 03. 2019

퇴사

2019년 4월 29일 저녁.


컴퓨터를 오래 하면 정신이 멍하다. 가끔은 끈질긴 두통이 오기도 하고, 눈이 시큰하게 건조해지기도 하고. 목과 손목은 굳어서 뻐근하다. 이래저래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있는 건, 죽음에 가까워지는 일 같다. 정신과 감각이 아득해지는 일. 회사에선 하루 8시간씩 계속 컴퓨터 앞이다. 꼬리 덕에 퇴사를 결심했다. 꼬리는 <이웃집에 신이 산다>라는 영화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자신의 남은 수명을 안 이후, 모두 노동을 멈춘다. 그리고 다른 존재를 깊이 사랑하고, 가깝고 먼 여행을 떠나며 황홀한 감각을 워간다. 퇴사의사를 전하고, 한 달간의 남은 회사생활은 공연히 더 지난했다. 하루라도 빨리 한낮의 큼직한 해를 쐬고 싶다, 무섭도록 자유로운 하루를 막연히 보내고 싶다, 늑장을 부리며 침대에서 꼬리를 더 오래 껴안고 싶다. 나는 마지막 건전지가 겨우 깜빡이는 사람처럼 회사에 나갔다. 꼬리는 내 출근에 맞춰 한 시간 일찍 공방으로 나섰다. 점심을 먹은 이후에는 전화를 해주었다. 공방에서 피곤한 수행을 마치고도 내 퇴근길엔 마중을 나왔다. 그리고 오롯이 꼬리와 보낼 수 있는 짧고 소중한 저녁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기운차고 부산하게 깨어나는 시장 골목을 지나던 아침 출근길, 회사 건물 입구로 슬쩍 나와 정수리로 쏟아지는 정오의 해를 맞으며 통화하던 10분, 멀리서부터 날 발견하면 달려오는 꼬리를 와락 끌어안는 퇴근길. 방전된 건전지에 찌릿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내 정신과 감각이 번뜩 깨어나던 순간들. 새까맣고 흐리멍덩한 지난 한 달의 시간 동안, 꼬리가 함께 해준 순간들은 별처럼 반짝 빛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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