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칩코 Jul 10. 2021

[전라도닷컴] 옛길의 풀들은 언제 그렇게 자랐나

전라도닷컴 9월호




반복의 깊어짐


가끔 어떤 순간은 잘 짜여진 각본 같다. 우리가 그 집 앞을 지나갈 것을 이미 알고 있던 것 같은 느낌. 서로 눈이 마주치리라는 것도, 우리가 어떤 말을 건넬지도 어젯밤에 미리 들은 게 아닐까 싶은 자연스러움. 새벽부터 시작된 걸음에 배가 주리던 이른 아침이었다. 한 식당 아주머니께서 나오시더니, '개가 참 예쁘네'하시며 말을 거셨다. 밥을 좀 얻어먹을 수 있냐는 물음을 기다리신 것처럼, 선량하고 반짝이는 눈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오랜 산행을 하고 해가 질 무렵 도착한 산골 마을. 기운이 없어 잠자리 탁발은 포기하고, 마을 정자가 어디있는지만 여쭈던 질문에 한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민박집을 내어주시던 아저씨.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기약된 손님을 맞이하듯이 우릴 방으로 안내해주셨다. 부담스러울 요청을 듣고도 전혀 난감해하지 않는 모습에 내가 도리어 어리둥절했던 순간들.


어떤 마음이셨을까? 정말로 우리가 올 것을 미리 귀뜸 받은 것이 아니라면. 낯선 이들의 요청을 한 점의 거리낌없이 끌어안을 수 있는 마음은. 그 분들의 삶을 상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같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얼마나 마주하셨을까? 그 무수한 순간들마다 그토록 기꺼운 미소로 손을 잡아주셨을까? 법정스님의 책 속에서 '반복의 깊어짐'이란 구절을 읽었다. 잘잘한 물살들이 섬진강 굽이 한 편에 널따란 모래언덕을 쌓아올리듯이, 매일의 웃음들이 쌓여 입가의 아름다운 호가 깊어진다. 베풂이 일상이 된 나날들을 통과하면 저런 자연스러움이 배어나오는 걸까? 어느 누구를 만나든, 어느 시기에 만나든, 삶의 촘촘한 결들을 환대로 채워왔을 사람들. 무해한 하루들이 반복될 적마다 더 맑고 그윽해졌을 눈동자들. 우리의 방랑은 이 눈동자들에 기대서 도도히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날이 무덥다. 뒷목이 따끔따끔할 정도의 햇볕이다. 한낮의 해는 도무지 무서워서 걷는 것을 포기했다. 하동은 유독 도로가 많았다. 마을 길들을 요리조리 통과하며 걸을 수는 없고, 도로를 통해서만이 길이 이어지곤 했다. 도로길은 걷기에 더욱 힘들다. 차량이 많아 위험하기도 했고, 한낮의 아스팔트는 온도가 매우 높아서 신발을 안 신은 동물에게는 유독 고되었다. 우린 봄이라는 개와 함께 걸었는데, 개들은 발바닥에 화상을 입기도 한다. 봄이 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딱딱하고 뜨거운 포장도로와 푹신하고 시원한 숲길은 비교가 안되었다. 산골짜기 도로로 접어들면서는 바로 옆에 계곡이 이어졌다. 땀에 젖은 몸을 계곡물에 시원하게 씻고, 평상에서 낮잠도 늘어지게 자고 나면 해가 주홍빛으로 변해있었다. 빨래한 옷도 보송한 햇살냄새와 함께 바싹 말라있었다. 요새는 그쯤부터 걸음을 시작하곤 했다.


우리는 계곡 물을 거슬러 산 깊은 방향으로 올라갔다. 신흥마을에 와서부터는 숲길 탐방로가 있었다. 나는 속으로 환호했다. 드디어 나무 그늘 없는 아스팔트 길과의 작별! 탐방로의 이름은 신흥마을에서 의신마을까지 닿는 옛길이라고 했다. 흙과 나무가 아니면 계곡물이 얕게 스치는 바위를 밟으며 걸을 수 있는 길. 원래는 인기가 좋은 탐방로였다는데, 코로나 때문인지 우리가 갔을 적엔 풀도 무릎까지 올라오고 얼굴마다 깨끗한 거미줄이 걸렸다. 지리산은 밤꽃 향기로 어지러웠다. 마을길엔 금계국과 낮달맞이, 송엽국과 참나리가 화려한데, 숲길을 들어가면 밤꽃 외엔 꽃이 별로 없다. 요즈음이 야생화가 없는 꽃궁기라나. 그럼에도 밤꽃 향기가 코끝에 내내 걸리니 심심할 틈이 없었다. 우리는 연신 감탄을 남발하며 길을 걸었다. 그러기를 잠시, 무릎을 스치던 풀들이 사라진 길목에서 바지춤을 확인해보았다.



진드기가 한 두마리 보였다. 아뿔싸하고, 자리를 잡은 채로 제대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 두마리가 아니었다. 쌀도 아니고 조보다 작은 사이즈의 새끼 진드기가 열마리, 스무마리, 오십마리쯤은 붙어있던 것이다! 우린 모두 경악을 했다. 보이는 대로 진드기를 털어내다가, 결국엔 계곡으로 내려가서 빨래를 하고, 온 몸을 씻어내었다. 씻고 나서도 찝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2주 전쯤 진드기에 물린 상처를 아직도 벅벅 긁고 있는 중이었다. 더는 물리고 싶지 않았다. 숲길은 이제 겨우 절반 온 상태. 남은 길은 바지춤을 부여잡고, 묘기를 부리듯 풀들을 피하면서 걸어야 했다. 풀이 잠깐이라도 스칠 때면 곧장 진드기를 확인했다. 별 호들갑을 떨며 걸어서인가, 의신마을에 도착하고는 힘이 한 줌도 남지 않았다. 그러고도 봄이 털 사이사이를 한참 수색하고, 내 몸도 한 번 더 씻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던 날이었다.


의신마을을 둘러보고, 이제 내려갈 차례. 마냥 해맑은 봄이를 제외하면, 우리 중 누구도 옛길을 다시 걷고 싶지 않아했다. 망설임 없이 도로를 택했다. 도로는 역시 불편했다. 차가 다니는 선만 표시해두었을 뿐, 사람이 다니는 길은 없었다. 차가 지나갈 적마다 아슬아슬 피하면서, 괜시리 무릎도 더 아픈 딱딱한 내리막길을 2시간을 걸었다. 그럼에도 옛길로 갈 것을 후회하진 않았다. 바퀴에 수차례 눌려 종잇장 두께가 된 가여운 뱀의 사체를 두 번이나 보고도 그랬다. 이 부자연스러운 멸균실 같은 도로가 더 나아보일 때가 있다니. 도로 옆 계곡 너머로, 우리가 걸었던 바로 그 옛길이 보였다. 차의 소음과 매연 없이, 무자비한 바퀴자국도 없이 고요해보였다. 저렇게 아름다운 길을 두고 온 나 자신이 돌연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작은 선택이 바꾼 일상


의신마을에서 인연이 닿은 분은, 마침 마을 토박이셨다. 학창시절 내내 그 길을 따라 분교가 있는 신흥마을로 오갔다고 하셨다. 지금은 탐방로로 꽤 잘 닦여 있어서, 나는 그 길이 과거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여쭈었다. 돌아온 답은 거의 그대로라고 하셨다. 하나 달라진 점은 과거엔 냇가를 두 차례 건너서 갔었는데, 현재의 탐방로는 냇가를 피해 우회한 길로 수정되었다고 하셨다. 비가 오면 냇가가 불어서 학교를 안 가곤 했는데, 지금은 비가 와도 탐방객들이 이용할 수 있게끔 말이다. 며칠 뒤 그 옛길을 다시 걸었을 땐, 우리가 두려워하던 풀들은 다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도 탐방로 관리인들이 예초를 싹 해둔 모양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분교에 가는 학생들이 부지런히 오갔을면, 길가의 풀들이 그토록 키가 컸을까? 아마 예초가 필요없었을 것 같았다. 지금은 말 그대로 '옛길'로 남았다. 옛길은 여행객들만의 길이 되었다.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은 70년대부터 군사용으로 만들어진 도로를 이용한다. 우리가 진드기를 피해 걸었던 그 도로였다.



나는 마을 사람들이 더는 옛길을 이용하지 않는 것이 덜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와 동시에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객인 나조차도 결국엔 도로를 선택한 셈이니까. 도로는 무수한 생명들의 자리를 빼앗고 만들어졌고, 현재까지도 무수한 생명들이 로드킬로 죽어가는 공간이었다. 도로가 넓혀진다고 하면 반대부터 하고 볼 나 같은 사람도 도로를 이용하지 않고 살아가지는 못했다. 도로 뿐만이 아니다. 내가 사용하는 핸드폰은? 내가 입은 옷과 신발은? 겨울철의 난방열은? 숲을 개발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내가 하나하나 타협해 온 것들은 얼마나 될까? 나는 숲에 호텔과 골프장을 짓자고 하는 사람들과는 얼마나 다른 사람인가? 사람들은 환경개발론자와 환경보호론자로 극명하게 나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 모호하고 삐뚤빼뚤한 결들 사이에서 출렁이고 있을 뿐이었다. 지리산의 생태계를 단절하며 관통하는 수많은 도로들은 나의 일상 속의 작은 편의, 작은 외면, 작은 무관심들로 다져온 것이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의 일상 속 선택들이 이 행성을 조금씩 조금씩 달구어 왔다.



반복의 깊어짐


어느덧 망종의 기억산책. 벌써 다섯번째가 되다보니, 꾸준히 와주시는 개근 방랑단원들이 있다. 더욱 반가워지고, 감사해지는 얼굴들. 회를 거듭할 적마다 그들의 성숙한 고민의 흔적들이 보이곤 했다. 기억산책에서 가장 기다려지는 것은 두 시간쯤 걸은 뒤 숨을 돌리며 먹는 간식시간이다. 간식은 조금씩 변화했다. 처음에는 일회용 낱개 포장이 된 과자들이 많았다. 햄과 계란 등의 동물성 재료가 든 김밥도 자주 등장하는 메뉴였다. 점차 간식들은 비닐봉지가 아니라 반찬통에 담겨왔다. 과자 같은 가공식품보다는 고구마나 감자, 토마토와 오이 등의 신선한 채소들이 많아졌다. 단골메뉴인 김밥은 이제 햄없이 만들어진다. 간식 변화의 일등공신은 재한님이다. 재한님은 '나이가 많을수록 모범이 되어야지'하시며, 매번 비닐포장 없이 자연식을 정성껏 준비해 와주셨다. 이번에는 달콤한 복숭아를 싸와주셔서 모두의 환호를 불렀다. '풀들이 말을 걸어서 도저히 빠르게 못 걷겠어'하시며 늘 천천히 걸으시는 나무내도 채식을 실천해보고 싶다고 하셨다.



간식만 달라진 것이 아니다. 재한님은 광주에서부터 지리산까지 자가용으로 오가시곤 했다. 매번 자가용을 타는 것이 환경을 오염시킨다며 아쉬워 하시더니, 이번에는 중간 위치에 차를 두시고 버스를 이용해서 오셨다고 한다. 별밤지기와 담비는 기억산책 후기로 방랑단을 자주 감동시켰다. 별밤지기는 지리산을 오르며 성취감만을 느꼈는데, 이제는 아픈 모습들에도 깊이 공감하겠다고 하셨다. '담비처럼 날렵하게 동물들을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시던 담비도, 당신의 소소한 행동들을 주의하고 불살생을 노력하기로 다짐하셨다. 이들의 변화는 우리의 일상을 얼마나 바꿀까? 우리의 작은 외면들이 지구를 바꾼 것처럼, 이들의 작은 관심들도 결국 지구를 바꾸지 않을까? 쓰레기를 덜 쓰는 것이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상의 반복들. 그 반복의 깊어짐. 무해한 하루들이 반복될 적마다 더 맑고 그윽해졌을 눈동자들. 녹색의 지리산은 이 눈동자들에 기대서 도도히 흘러갈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