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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칩코 Jun 28. 2021

[전라도닷컴] 원 안의 누군가는 곰을 부른다

전라도닷컴 8월호


무해한 호기심


지리산은 온 골짜기와 봉우리마다 녹색으로 차오르는 계절을 맞았다. 개복숭아와 매실이 야물게 열리고, 길 위엔 감꽃과 장미꽃이 발자국처럼 쌓이는 날들. 한 끼라도 굶으면, 배가 고플까 발을 동동 구르시던 할머니 댁이었다. 버찌의 보라빛으로 물이 든 당신의 평상에서 쉬다 가라며 마음을 내주셔서 인연이 닿았다. 할머니는 큰 허리수술을 마치고 구부정 걸어다니셨다. '똘남'이라고 부르시는 개와 함께 사셨는데, 똘남이는 성격이 참 좋았다.



똘남이는 하루종일 줄에 묶어지냈다. 무슨 종인지 헷갈릴만큼 여러 종이 섞인 것 같았다. 그 짧은 줄이 답답해 제자리를 왔다갔다 날래게 뛰어다니는 것을 보니, 보더콜리 얼굴이 좀 보이기도 했다. "묶인 개들은 끌러주면 무조건 좋아하지." 똘남이 산책을 시켜주어도 되냐고 여쭈니 돌아온 답이었다. 허리가 아프신 할머니가 산책을 시켜줄 수도 없고, 할머니의 자식 분들도 자주 방문을 못하신다고 하셨다. 얼마만의 산책인걸까. 똘남이와 함께 산길을 올랐다.

똘남이는 허겁지겁 달렸다. 자세히 보니 똘남이 허리가 좀 휘어있었다. 묶인 채로 대문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하도 줄을 당겨서 휜 것 같았다. 똘남이는 약간 대각선으로 달리면서도, 정말 빨랐다. 오르막길을 뒷다리로 껑충껑충 차면서 가볍게도 올랐다. 나는 턱 끝까지 숨이 차서 똘남이를 따라가기 바빴다. 똘남이는 지칠 기색도 없이 뛰어다니다가, 체할 듯이 이곳저곳 냄새를 맡았다. 어느새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은 나는, 별안간 눈물이 터졌다. 정말이지, 얼마만의 산책인걸까. 하루종일 묶여지내는 똘남이에게, 자유가 주어졌을 때 하고싶은 일이란 이런 것이었다. 안 가본 길을 가보고, 온갖 냄새를 맡아보는 것. 그토록 무해한 호기심이 얼마나 오래 묶여있던 것일지, 가늠해보기가 너무 아파서.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길 때


상글의 첫인상은 새침했다. 모로 앉아 상대를 탐색하는 고양이 같은 인상이었다. 상글을 두번째 만났을 때, 나는 마침 묵언수행 중이었다. 상글은 그날도 약간은 경직돼보였다. 나는 말을 못하니 온갖 몸짓과 표정으로 말을 했는데(?), 상글은 그런 나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몇시간도 안 가 묵언을 깨고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상글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호기심! 나는 상글과 호기심 덕에 친해졌다.


상글은 호기심이 많다. 방랑을 하다보면, 상글은 어느새 다른 곳에 가 있을 때가 많다. "저기는 뭐하는 곳일까?", "저 분은 어떤 사람일까?" 이런 혼잣말을 남기고는 사라져있다. 상글은 이렇게 만든 인연들이 엄청나게 많다. 나와 처음 만날 적에 상글은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고 했다. 보통의 상글은 경직된 사람은 아니었다. 늘 눈과 귀를 열고 다니는 사람. 내가 못 본 길을 기억하곤 하는 사람이었다.



상글은 봄이라는 개와 친구가 됐다. 봄이는 더더욱 호기심 대장이다. 봄이와 방랑을 할 때면 놀랄 때가 많다. 내가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곳으로 봄이는 뛰어드는 순간이 많았다. 앞도 안보이는 덤불 같은 곳으로. 봄이는 빨리 가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주위의 것들을 하나하나 냄새를 주워 담으며 걸었다. 호기심은 야생성의 지표.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길 때, 우리는 세상과 가까워진다.


방랑을 할 때는 마을이나 도로를 종종 걷는다. 그럴 때면 봄이를 묶어서 데리고 다닌다. 세상만사 궁금한 게 많은 봄이를 데리고 다니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봄이가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곳으로 가려고 하면 봄이를 잡아끌어야 하는데, 그럴 때면 기분이 정말 좋지 않다. 내가 무슨 권리로 이럴 수 있는 걸까. 깊은 산을 걷거나, 인적 없는 밤길을 걸을 때 상글은 봄이를 풀어주곤 한다. 그리고는 두 팔을 벌려 '해방이다!'하며 소리쳤다. 봄이한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상글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누군가를 구속한다는 건, 자신도 속박하는 일이라는 것을 상글은 알고있었으니까.


호기심의 죽음


지리산 방랑단은 구례에서 반달가슴곰을 두 번 보았다. 한번은 반달가슴곰 생태학습장에서다. 지리산 국립공원은 멸종위기에 처했던 반달가슴곰을 복원 중에 있다. 이때 야생으로 방사했으나 적응하지 못한 곰들은 결국 생태학습장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스스로 먹이를 구하지 못하고 자꾸 등산로에 출몰하는 곰이나, 올무에 걸려 다리가 절단된 곰, 하루에도 같은 곳을 백번씩 오가며 정형행동을 하는 곰 등이 있었다. 생태학습장의 환경은 쾌적해보였으나 이상적이진 않았다. 사람들이 구경을 하는 것을 경계하고 불안해하는 곰이 많았다. 수용한 곰에 비해 공간이 협소해서, 평소 곰들은 철창에 가두어져 있다가 돌아가면서 방사되는 형태였다. 곰들은 하루 20~30키로를 이동하며 생활한다. 생태학습장이 아무리 잘 갖춰있어도, 야생에서의 생활반경보다는 좁을 수밖에 없었다.


두번째는 문수사였다. '반달가슴곰이 있는 절'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고 있었다. 구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문수사의 곰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반달가슴곰은 멸종위기종으로서 보호되고 있는데 어떻게 절이 사유할 수 있는걸까. 이곳저곳 주민들에게 여쭈니, 그 절의 곰은 '축산물'로 취급된다고 했다. 소와 돼지를 소유하고 가둘 수 있는 것과 같은 경우였다. 곰의 웅담을 채취하기 위한 사육장에서 길러지다가, 웅담을 생산하는 게 불법이 된 이후 오갈 데 없어진 곰들이 있다. 죽이긴 죄스럽고, 살려두기엔 돈이 아까운. 그 곰들 중 몇 마리를 데려다 놓은 것이라는 예상들이 많았다. 스님에게 물어보면 확실할 것 같으나, 스님은 방랑단과의 대화를 거부하셨다.

문수사에 닿기 전부터 곰들의 상황은 짐작했었다. 동물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 조차도 가엽다며 혀를 차며 나왔다. 실제로 보니 상황은 더욱 참담했다. 붉고 녹슨 철창은 곰이 서너 발자국 정도 움직일 공간밖에는 되지 않았다. 심지어 바닥까지도 철창으로 되어있는 뜬장이었다. 유럽에서는 너무 잔인한 축사형태라 불법이 된 배터리케이지와 비슷한 형상이었다. 철창 한편에 원통형 입구를 통해 사료를 부을 수 있게 돼있었다. 같은 입구로 물도 붓게 돼 있어서, 곰이 먹을 그릇은 물에 불은 사료들로 지저분했다. '사료 한 바가지 2천원'이라고 적혀있었다. 20년 전 곰 네 마리를 시주받아 n마리는 방생하고, n마리는 사나워서 가두었다고 설명이 써있었다. n마리는 글자수가 자꾸 바뀌었는지 지워져있었다. 20년 동안 같은 곰을 기른다고 적혀있었으나 주민들의 말은 달랐다. 계속 곰이 어려진다거나, 곰이 한 마리 더 늘었다는 말들을 들었다.

곰의 눈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겁에 질리거나 화가 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 표정이 없었다. 철창 밖을 지나다니는 이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곰은 세 마리가 각자 다른 케이지에 갇혀있었는데, 모두 사료통 앞에 앉아만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료를 부어도 그것을 먹지는 않았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왜 모두 사료통 앞에 있는 걸까. 나는 생태학습장의 곰들을 떠올렸다. 그곳엔 적어도 곰들이 가지고 놀 나뭇가지들과 잎사귀들이 널려있었다. 사이가 좋은 곰들은 서로 뒤엉켜 장난도 쳤다. 아주 높은 나무 꼭대기에 거대 새둥지처럼 곰침대를 만들어 두고 쉰다고도 했다. 이 곰들의 철창 안에는 어떤 것도 없었다. 그 좁은 공간 안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건, 사람들이 부을 때마다 나뒹구는 사료 뿐이었다. 사료통. 지옥같은 무료함 속에 사는 곰들에게 유일한 호기심이었을까.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길 때


어느덧 소만의 기억산책. 우리는 문수사 근처의 풀밭으로 갔다. 오늘의 숲놀이는 동그란 원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되고싶은 동물을 하나씩 골랐다. 나는 닭이 되어보았다. 어떤 사람은 개미, 어떤 사람은 돌고래가 되어 보기도 했다. 스무마리의 동물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섰다. 닭부터 시작. 닭은 숲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꼭 필요한 존재를 고른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지렁이도 맛있겠지만, 늑대도 정말 필요할 것 같았다. 닭들이 부리가 더 단단해지고 발톱이 날카로워지려면 천적의 존재가 중요하지 않을까. 닭은 늑대를 원 안으로 초대한다. 이제 늑대 차례다. 늑대는 주린 배를 채워주는 토끼를 초대한다. 차례에 차례를 이어, 마지막 지렁이와 코끼리만 남았다. 두 존재가 어떻게 연결될까, 싶은 순간. 지렁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똥을 만들어준다며 코끼리를 초대한다. 모든 동물들이 원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속으로 신기했다. 숲놀이를 기획하긴 했지만 기대보다 훨씬 재밌었다. 모든 존재가 이렇게 이어져있다니!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유명한 사례가 있다. 인간에게 위협적인 늑대를 죽였더니 사슴이 비정상적으로 늘어나 국립공원 내 모든 풀과 물살이들을 없애버렸다고 한다. 이후 다시 늑대를 풀고나서야 생태계는 아름다움을 되찾았다. 반달가슴곰은 일제강점기 때 해로운 동물을 말살하는 정책과 웅담과 곰발바닥이 건강에 좋다는 보신문화에 의해 멸종 위기에 이르렀다. 이제 한국에 더는 없을 줄 알았던 곰이 90년대 후반 기적처럼 관찰카메라에 찍혀 복원사업이 시작됐다. 곰을 왜 되살리려할까? 곰이 생태계에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숲놀이처럼, 누군가는 원 안에서 곰을 부르고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 문수사의 곰들이 숲의 품으로 들어간다면 무엇을 할까. 펄쩍 달려도 보고, 나뭇가지를 훑어 열매를 한 가득 입에 넣을까. 누군가의 세상을 고립시키면, 나의 세상도 그만큼 좁아진다. 세상과의 송신기 하나가 끊어진 셈이니까. 그 고립의 창을 깨고 야생성을 돌려준다면! 호기심은 야생성의 지표.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길 때, 우리는 세상과 가까워진다. 똘남이가 마당 너머의 산길과 연결되고, 상글이 봄이 줄을 풀어주고도 같은 방향으로 걷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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