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칩코 Jul 14. 2021

[전라도닷컴]섬진강을 섬진강이라고 부르기 훨씬 이전부터

전라도닷컴 10월호



쌀이라는 한 글자보다도


쌀이 떨어졌다. 빈 쌀 봉투를 들고, 마을을 어슬렁거렸다. 열린 대문 틈으로 한 할머니께서 마당에서 양치질을 하고 계셨다. 나는 대문을 두드리며 얼굴을 반쯤 내밀었다. 대문 밖에서 '어르신!'하고 외치는 소리를 할머니들께서 들을 확률은 낮으므로. 할머니는 계속 양치를 하셨다. 나는 어깨까지 대문 안으로 밀어넣으며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는 그러고도 나를 못 알아채셨다. 결국 마당 안쪽의 수돗가까지 다가가서야 할머니는 나를 바라보셨다. 나는 할머니 코 앞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지리산방랑단에 대해 설명을 했다. 할머니는 미안한 표정으로 "귀가 먹어서 잘 안들려"라고 하셨다. 나는 앞뒤 설명을 포기하고 입모양을 크게 해가며 배가 고프다고 말씀을 드렸다. 할머니는 여전히 미안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귀가 밝은 할머니를 찾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안다. 나는 머리를 굴리다, 가져온 쌀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엔 '쌀'이라고 크게 적혀있었다. 할머니는 한층 더 난감하신 표정으로, "내가 글을 못 읽어"라고 하셨다. 아뿔싸, 이건 생각을 못했다.


내가 할머니댁에서 어떻게 쌀 한바가지를 얻어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밥 먹는 시늉을 손짓으로 해가며 겨우 소통을 했다. 할머니께 감사인사를 여러번 꾸벅이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 쪽이 죄송하고 쓸쓸했다. 한국와서 대뜸 영어로 길을 묻는 외국인이 된 기분이었달까. 나는 '쌀'이라는 한 글자를 내려다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겸허함을 느껴야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꼬리에게 해주었다. 꼬리는 뜻밖의 반응을 했다. 시골생활은 그래서 멋지다고 말이다. 귀도 어둡고 글자를 몰라도 일상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시골생활의 단순함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내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만큼 단순할 할머니의 일상을 그려보았다. 밥 먹는 시늉이라는 고요하고도 명료한 언어로 돌아갈 일상. 익숙한 동선마다 닳은 문지방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나를 배불린 할머니의 쌀 한 바가지. 쌀이라는 한 글자보다도 군더더기가 없을 것 같았다.



봄이는 누구보다 잘 안다


봄이라는 개와 방랑을 함께 하면서 생긴 습관이 있다. 잠시 외출했다가 숙소에 들어갈 때 발걸음보다 목소리를 먼저 내는 것이다. 살금살금 다가가서 "봄이야"하고 다정하게 부르면서 현관문을 열면, 봄이가 꼬리를 흔들며 문 앞에 나와있다. 그렇지 않으면 현관을 열기 전부터 우렁찬 봄이의 짖음이 들려온다. 방랑을 하면 숙소가 자주 바뀐다. 그럴 때마다 봄이는 새로운 숙소가 우리 영역이라는 것을 매번 새로 인지해야 한다. 이 집이 우리 영역이라는 것을 알고나면 봄이는 작은 발걸음 소리에도 잘 짖는다. 영역을 지키기 위함인 듯하다. 자기 영역인데도 자기가 어찌할 수도 없이 현관문이 열리고 낯선 사람이 들이닥치면 봄이는 많이 당황한다. 귀청이 떨어져라 짖기 시작한다. 현관문을 지키고 있으나 문을 열지도 닫지도 못하는 봄이는 그 상황이 얼마나 답답할까 싶다.  


봄이는 읍내에 가면 긴장한다. 자동차가 쌩쌩 달리고,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커다란 건물에서 시끄러운 음악이 쏟아져 나오고, 갑자기 자동문이 열려버리기도 한다. 읍내에선 봄이가 아는 것이 아주 적어진다. 왜 인간 동물만 이렇게 많이 사는지, 왜 흙과 풀이 이리도 없는지, 나무들은 왜 일정한 간격으로만 심겨져 있는지. 봄이의 유전자 속에 축적된 유구한 지혜들 속에서는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것들. 봄이는 꼬리를 다리 사이로 숨기고 분주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걷는다. 그런 봄이를 볼 때면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낯선 행성에 불시착한 외계인들이 지을 법한 표정이다. 미국 여행을 할 때, 친구를 따라간 파티 자리에서 나도 꼭 저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봄이는 산을 달릴 때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는다. 이미 수없이 달려 본 길을 가듯 겁도 없이 질주한다. 저 아래 비탈에서 부스럭 소리만 나면, 튼튼한 뒷다리로 껑충 달려가 낙엽 속으로 풍덩 빠지곤 한다. 그럼 그곳에 숨어 있던 꿩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봄이가 잡을 수 없는 높은 곳으로 날아간다. 숲 속에서의 모든 과정들은 봄이의 유전자 속에 있다. 봄이는 누구보다 잘 안다. 자신이 얼마나 빠르게 달릴 수 있는지, 턱으로 얼마나 단단한 것을 부술 수 있는지, 자신이 이 숲에서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두꺼비들은 누구보다 잘 안다


하동의 악양면에는 동정호가 있다. 관광지로 많이 찾아오는 인공호수이다. 이곳은 원래 밭으로 이용되던 축축한 땅이었다고 한다. 섬진강의 둑을 쌓기 전에는 물이 이따금 범람하곤 하는 지대에 속하기도 했단다. 동정호에 가면 깜찍한 표정을 지은 두꺼비 캐릭터들이 이곳저곳에 서 있다. 동정호에는 두꺼비들이 산다. 섬진강의 '섬'이 두꺼비 섬(蟾)자라는 것을 나는 그제야 알았다. 두꺼비들은 지리산의 끄트머리 자락인 고소성 군립공원에서부터 이곳 동정호까지 내려와서 알을 낳는다고 한다. 동정호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섬진강까지 내려갔으려나. 두꺼비와 같은 양서류가 왜 '양서류'라고 불리는지도 그제야 알았다. 물과 육지 양쪽에서 서식하기 때문이란다. 두꺼비는 지리산과 섬진강을 이어주고 있었다.



이 모든 설명을 명희님에게 들었다. 명희님은 동정호의 생태를 모니터링하는 일을 하신다. 동정호에는 두꺼비 뿐 아니라 멸종위기종인 금개구리와 수달도 산다. 그들 모두가 잘 살고 있는지 지켜보는 것이 명희님의 임무이다. 방랑단이 동정호에 갔을 적엔 커다란 잉어 시체 두 구가 호수가 둥둥 떠 있었다. 한 구에서는 썩은 내가 심하게 났다. 호수의 가장자리에는 부옇게 녹조가 끼어있었다. 마을에서 내려오는 농약 섞인 농업용수도 함께 호수에 섞인다고 하셨다. 봄이가 호수의 물을 마시려는 것을 저지할 수밖에 없었다. 명희님이 걱정하시는 것은 호수의 수질만은 아니었다. 호수에 잠긴 버드나무들도 있었다. 호숫가에 있는 버드나무는 진한 녹색의 잎사귀들이 빼곡히 자라있었으나, 호수 한 가운데에 뿌리가 잠긴 버드나무는 희미한 연둣빛 잎사귀들이 듬성듬성 나 있었다. 몇 그루는 이미 선 채로 죽어있었다. 나머지도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버드나무는 뿌리가 물에 잠기면 안되는 수종이라고 하셨다. '아름답게' 조성하기 위해 버드나무를 물에 완전히 가둔 것이 원인이라고 하셨다.



명희님과 동정호와의 인연은 도로에서 시작되었다. 명희님은 어느 봄날, 동정호와 고소성 군립공원 사이의 도로를 지나다가 두꺼비들이 몰살 당한 현장을 목격하셨다. 봄철에 두꺼비들은 알을 낳기 위해 물가로 내려간다. 산과 물가 사이는 도로가 가로놓여 있었고, 그 도로를 미처 건너지 못하고 두꺼비들은 알을 품은 채 죽어버렸다. 명희님은 두꺼비들의 시체를 한 구 한 구 촬영했다고 하셨다. 백 마리가 훌쩍 넘는 수였다. 이후 두꺼비 로드킬 문제가 대두되어 도로는 초록색으로 칠해졌다. 속도를 줄이라는 문구도 크게 게시됐다. 생태 모니터링 시민단이 꾸려진 것도 그 이후라고 하셨다. 몇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로드킬은 여전하다. 동정호에 만들어둔 두꺼비 생태이동통로는 실효가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로드킬 수는 5분의 1 수준으로 감소했다. 명희님은 즐거워 보이셨다. 녹색 부유물이 낀 호수에 첨벙 손을 담그고 우리에게 마름이라는 식물을 소개해주시기도 하고, 녹음된 금개구리 울음소리를 재생하시며 금개구리들이 물 위로 고개를 뻐끔 내밀기를 기다리기도 하셨다.


두꺼비들의 유전자 속에 기억된 리스트에도 아마 도로는 없었을 것이다. 봄이의 유전자 속에 자동문이 없던 것처럼. 아주 먼 옛날부터, 인간들이 섬진강을 섬진강이라고 부르기 훨씬 이전부터 두꺼비들은 지리산과 섬진강을 오가며 알을 낳았을 것이다. 그들의 단순하고도 명료한 삶의 지도에는 '봄철에는 강가로 가라'라는 문구가 적혀있었을 테니까. 두꺼비들이 아무리 빨리 달아나도 피할 수 없을 속도로 자동차들이 쏟아지는 도로에 대한 정보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두꺼비들이 겪었을 어리둥절함과 쓸쓸함을 상상해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당황스러움을 채 느끼기도 전에 바퀴에 깔려버렸을 두꺼비들. 인간 동물 손가락 하나만 도로에 나뒹굴어도 뉴스에 난리가 날텐데, 어떤 죽음들은 온 몸의 피부가 터져서 납작해진 채 도로를 뒤덮어야 주목을 받는다. 봄이가 숲 속에서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는 것처럼, 두꺼비들도 어떤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능수능란한 존재일 것이다. 아마 그 세상은 지금 이곳보다는 단순할 것이다. 오늘 꼭 끝내야만 하는 서류도, 오후 5시까지 늦지 않게 도착해야하는 회의도, 무엇을 짓밟고 있는지 인지도 못한 채 꼭 자동차로 달렸어야 하는 어떤 이유도 없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매실이라는 두 글자보다도


지리산은 매실향으로 가득하다. 어느덧 황금빛이 된 매실들이 땅을 뒹굴고 있다. 나는 아직도 살구나무와 매실나무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살구인 줄 알고 열심히 주워먹던 것들이 황매실인 줄은, 기가 막히게 달콤한 진짜 살구를 먹은 후에야 알았다. "요새 떨어진 것들은 다 매실이라고 보면 돼. 집집마다 매실만 담그는 철이잖아."라고 한 할머니는 말씀해주셨다. 집집마다 설탕을 켜켜이 부은 매실이 익어간다. 오랜만에 연락을 한 엄마에게도 매실 소식을 듣는다. 엄마는 도시에 살면서도 이 철만 되면 매실을 담그신다. 왜 담그냐고 물으면, "몰라. 이 철에는 매실을 담가야 돼"라고 하신다. 지난 생에 수없이 매실을 담가온 할머니의 유전자들이 엄마의 몸에도 흐르는 모양이다. 이 철에는 매실을 담가야 돼. 두꺼비들이 때가 되면 물가로 내려가듯이. 우주의 별을 헤아리는 것만큼 복잡하고 어려운 생태계의 비밀이 있겠지만, 그건 단순한 삶의 지도에는 적혀있지 않다. 그저 철을 느끼듯이 살아가면 되는 일들이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