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11월호
나를 돌봐주는 이
7월의 끄트머리. 더위는 이제 시작인 양 기승이지만, 방랑단은 어느덧 끝날 시기가 다가온다. 방랑하는 사개월이 짧은 시기 같으면서도, 다달이 변화무쌍한 날들이었다. 사월에는 벌칙 같던 정자에서의 잠자리가, 칠월은 이토록 반가워졌으니 말이다. 모기장 하나만 치고 정자에 누우면 지상낙원이 따로 없는 계절이다. 대서 기억산책을 나흘 앞두고, 방랑단은 잠시 흩어져서 쉼의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이라 그런지 나름 능수능란해져서 이미 기억산책 코스를 다 짜두고, 공지 업로드까지 준비가 다 된 시점이었다. 나는 꼬리와 둘이서 둘레길을 걸었다. 장마 동안 못 걸었던 것이 한이 되었던지 땀을 좀 흘리고 싶었다.
숲길을 맨발로도 걸어보고, 계곡에서 개운하게 목욕도 하고, 내 가슴께까지 풀이 자란 숲에서 돌연 길도 잃어버리면서. 즐거운 휴식이었다. 그런데 머릿속 한 편에서 자꾸 재잘거리는 목소리도 있었다. “와, 이 길 기억산책 코스로 사람들과 함께 걸으면 정말 좋겠다”, “이 숲은 너무 아픈 사연이 있네. 사람들에게 기억산책 때 말해주어야지.”하는 목소리. 사개월 간 습관이 되어 버렸던가. 좋은 코스만 보면 몇 시간이 걸릴지 재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기억산책은 내게 어느 정도 부담이었다. 어떡하면 더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어떡하면 더 다채롭고 아름다운 길로 안내할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했으니까. 그 부담은 책임감에 가까웠다. 내가 길을 잃지 않고, 나태해지지 않도록 나를 돌봐주는 이. 기분 좋은 책임감. 기억산책의 참여자들이 내게 선물해준 것이었다.
그 도로에 얽힌 물, 물, 물
죽은 꿩을 만났다. 도로 위에서였다. 보통 도로 위 죽은 자들은 아스팔트와 하나가 돼 있곤 하는데, 내가 발견했을 때는 아직 납작해지기 전이었다. 다가가서 만져보니 몸이 따뜻했다. 몸통을 살짝 들어 올렸는데 목이 축 늘어졌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곧 치료를 하면 살 수도 있을 것 같은 체온이었는데, 늘어진 목과 함께 터져 나온 눈알이 덜렁거렸다. 죽음. 내가 생각하던 죽음의 온도와는 너무 달라서 나는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그 도로는 시체가 많았다. 내가 하루에 걸으면서 본 시체만 대여섯 구였다. 이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생수 공장이 나왔다. 하루에 수천 리터씩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공장이었다. 이제는 몇 년 전에 비해 두 배나 깊이 파내야 퍼 올릴 수 있다는 지하수. 청정함을 증명하듯 지리산 이름을 붙여서 도시로 팔려나가는 물이었다. 공장 인근의 주민들은 논물을 끌어다 쓰려 해도 지하수가 나오지 않아 골칫거리라고도 하셨다. 꿩이 죽은 그 도로 위로 물을 실은 대형트럭이 끊임없이 오고 갔다. 하루에 사백 대라고 했다.
트럭이 아니어도 그 도로는 교통량이 많았다. 도로 근처엔 아름답고 큰 물줄기가 흘렀다. 7월 같은 성수기에 내대계곡은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관광객들이 타고 오는 차량이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도로는 교통체증으로 혼잡했다. 내가 꿩의 시체를 옮기는 짧은 순간에만 해도, 차량 여섯대가 나를 재촉하고 있었으니까. 계곡엔 쓰레기가 넘쳤다. 튜브와 구명조끼, 물총, 슬리퍼 등이 바위틈마다 끼어있었다. 우린 쓰레기를 주워놓고도 난감했다. 도무지 쓰레기라기엔 너무 멀쩡한 것들이었다. 계곡 주변은 고기 굽는 냄새와 소음으로 가득했다. 그 계곡을 가장 가까이 낀 ‘예치마을’은 마을 전체가 펜션이었다. 우리가 밥을 탁발하려고 하자 한 할아버지는 손을 절레절레 저으시며 우릴 내보내셨다. ‘마을 전체가 돈 벌려고 얼굴이 벌개. 무슨 밥을 얻어먹어.’라는 말씀에 우린 마을을 빠져나왔다.
예치마을은 새로 생긴 마을이었다. 생수 공장보다 더 위로 올라가면 이 십 년쯤 된 양수발전소가 있다. 상부댐과 하부댐을 짓는데 수장된 마을이 여럿이었다. 사라진 마을 주민들이 새로 이주해서 인공적으로 형성된 펜션촌이 바로 이 예치마을이라고 했다. 인간들은 이주를 했지만, 인간이 아닌 주민들은 그대로 물속에 가둬버린 양수발전소. 댐의 벽은 위압적인 크기였다. 댐의 주변은 바다 깊은 곳처럼 찬기가 새어 나와서, 완전히 다른 계절을 보내고 있었다. 근처의 나무들은 칠월이 되어도 짙푸른 색이 아니라 희미한 연둣빛이었다. 양수발전소가 세워진 이후 수질이 눈에 띠게 안 좋아졌다는 말씀들을 들었다. 꿩이 죽은 그 도로는 양수발전소 하부댐에서부터, 관광객 북적이는 예치마을을 지나, 사백대의 트럭이 오가는 생수 공장을 지나, 냉동창고 같은 상부댐까지 이어져 있다.
그 도로에 얽힌 물님, 물님, 물님
대서 기억산책. 하루는 양수발전소 상부댐까지 이어지는 옛 산길을 걷고, 다음 날은 하부댐과 이어진 이 도로를 걸었다. 마지막 기억산책이라 그런지 참여자들이 많았다. 참여자들이 많은 기억산책 때는 방랑단의 서툰 진행이 더욱 돋보여서 산만해지기 일쑤인데, 이번엔 깨나 합이 좋았다. 참여자들이 잘 따라와 준 덕이었다. 신나게 물놀이를 하면서 참여자들도 서로 빠르게 친해졌다. 우리는 서로 존댓말을 한다. 초면이기도 하고, 서로를 존중해주기 위함이다. 서로의 물건을 빌릴 때는 허락을 구한다. ‘물안경 저도 써봐도 돼요?’하고 말이다. 서로의 몸을 만질 때도 그렇다. ‘돌이 미끄러우니 제 손을 잡으세요.’처럼.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면 이 정도는 상식으로 통한다. 그렇다면 자연과도 좋은 관계를 맺는 방법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번 기억산책의 숲놀이는 모든 생명들에게 존칭을 해보는 것이었다. 우리가 사람들과 하는 것과 똑같이, 자연에게도 허락을 구해보기로 했다.
계곡물님을 만나면 먼저 인사를 했다. 그리고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허락을 구한다. 허락하시면 신나게 헤엄을 치고 놀았다. 다 논 이후에는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감사의 표시로 쓰레기가 있다면 줍기도 했다. 산을 오를 때는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흙님과 낙엽님에게 인사를 했다. 산딸기 나무님을 마주치면 인사를 한 뒤, 열매를 먹어도 되겠느냐고 여쭈었다. 간식 시간에는 감사를 드려야 할 분들이 넘쳤다. 옥수수님, 감자님, 포도님, 복숭아님... 늘 간식을 가져온 사람들에게만 감사를 해왔지만, 사실 옥수수님은 옥수수님 자신이 주인이다. 주인에게 먼저 감사를 드린 후, 그를 모셔온 분에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 기억산책 내내 재잘거리는 소리들이 넘쳤다. 여기저기 감사를 드려야 할 분들이 넘쳤기 때문이었다. 허락을 구하면, 대부분의 생명들은 우리에게 자애로웠다. 기꺼이 우리의 요청을 받아주셨다. 물론 거절을 할 때도 있다. 가령 나무를 벨 때, 새가 둥지를 틀었다면 거절의 의미. 약초를 캘 때, 그 약초가 마지막 약초여도 거절의 의미. 사람의 언어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귀를 잘 기울여야 한다.
이튿날은 산길이 아닌 도로를 걸어갔다. 도로엔 인사를 할 흙님, 계곡물님, 산딸기님들을 만날 수 없었다. 댐과 계곡과 생수 공장을 잇는 그 도로였다. 이 모든 것들을 지어도 되겠느냐고 정말 모든 이들에게 허락을 구했을까? 인간 주민만이 아니라 모든 주민말이다. 정말 그 모든 존재가 고개를 끄덕였나? 그들의 대답에 정성을 들여 귀를 기울였나? 인간 주민들과는 금전적 합의를 보았다 치더라도, 돈이 필요 없는 존재들에게는 어떤 보상이 주어졌나? 물님에게 어떤 위로와 사과를 해야 하지는 않은가?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말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무엇일까? 거대한 댐의 성벽 앞에서 머리가 자꾸 숙여지는 기억산책이었다.
나를 돌봐주는 이
나는 지난해 남원으로 귀촌했다. 지리산 품에서 고작 일 년을 살았을 뿐인데, 요새는 오히려 도시에 가면 답답해서 잘 못 지낸다. 공기도 너무 매캐하고, 뭘 먹어도 꼭 체를 한다. 내가 도시를 떠난 것도 지독한 위장병 때문이었다. 지리산만 오면 이상하게 속이 괜찮아졌다. 지난 일 년 동안 얼마나 건강하고 배부르게 지냈는지, 봄이면 나물을 캐 먹고, 가을이면 홍시를 주워 먹었다. 지리산이 참 고마운 나날이었다. 방랑을 하며 얻어 먹어보면, 꼭 곳간에서 인심이 나는 것은 아니다. 지리산도, 곳간이 한없이 넉넉하기만 해서 인심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지리산이 나를 돌본 것처럼, 지리산도 돌봐줄 이들이 필요했다. 산악열차나 양수발전소 계획은 아직도 지리산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지리산을 위해 어떤 것을 했나? 나를 방랑길에 세운 것은 아마도 이 질문이었다. 지리산을 향한 부채감. 나도 무언가 돌려주어야 했다.
그러나 방랑단으로서 사라진 숲 이야기를 채집할 적마다, 나의 부채감은 눈덩이처럼 불기만 했다. 내가 버린 쓰레기, 사용한 전기, 흘려보낸 오수가 모두 지리산에 남아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바심이 났다. 지리산이 나를 미워하게 돼서, 지난해 같은 품을 내어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내 우려와는 달리 올해도 나는 모자람 없는 풍요를 누렸다. 지리산은 내게 맑은 물과 공기, 봄나물과 여름 열매를 베풀었다. 나에게 지리산은 집이자, 식탁이자, 약국이자, 예술가이면서 선생님이었다.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했다. 사랑에 보답하는 것은 어렵지만 간단하다. 얼굴을 마주보면 반갑게 인사하는 것, 그의 집에 쓰레기나 오수를 버리지 않는 것. 송전탑이나 기지국이나 발전소로 피곤하게 하지 않는 것. 이런 실천을 일상으로 가져오려면 책임감이 필요하다. 숲놀이를 하며 감사인사를 너무 많이 드린다고 투덜대지 않았듯이, 받은 사랑을 너무 많이 돌려주어야 한다고 투덜거릴 필요도 없다. 기분 좋은 책임감은 결국 나를 돌봐줄 것이다. 내년에도 지리산의 인심을 나눠 받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