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칩코 Oct 20. 2021

[전라도닷컴] ‘독수리의 눈’을 보내주신 지리산님께

전라도닷컴 12월호


이 편지를 쓰는 것을 망설였다는 것을 미리 밝히고 싶군요. 산님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이요. 유치해 보일 것 같은 우려를 만회할 만한 글 실력까지는 자신이 없는 것이 고민의 이유입니다. 지난 호에서 아셨다시피, 마지막 기억산책을 전후로 방랑단은 모든 만물에게 존칭을 하고 말을 걸기로 했었는데요. 숲‘놀이’라며 참여자들에게 소개하기는 했지만, 저는 퍽 진지했습니다. 이제껏 무례하게 굴어온 것을 사죄하지 않으면 현생의 재수가 덜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만큼이요. 사명감을 느꼈달까요. 이제는 모든 존재들과, 말이든 마음이든 어떤 절차를 거쳐서 대화해야 한다고 여기게 되었거든요.     


여전히 낯선 사람과 말을 할 때면, ‘양배추님’이라든가 ‘지렁이님’의 단어 끝을 흐리게 돼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우습게 보일 것 같아 염려하느라, 양배추님이나 지렁이님을 하대해버리는 쪽을 택하는 것이지요. 양배추님보다 인간의 눈치를 더 살핀다는 게 비겁하게 느껴집니다. 어떤 점이 우습게 보일 것 같으냐 하면, 모든 만물에 습관적으로 존칭을 하는 모습은 꼭 유별난 생태 감수성을 가진 사람처럼 보여서... 남들이 저를 대단한 생태주의자로 보고 기대를 했다가 실망할 것이 미리 부담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실은 ‘파리님을 내쫓아야겠다’식의 문장도 곧잘 내뱉고야 맙니다.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아직 못 따라갔을 뿐입니다. 그런 이유로, 제가 지리산님께 본격 편지를 쓰는 일도 적잖이 부담스러웠던 것이어요.    

 

제 편지도 굽어 살펴주실 지리산님! ‘독수리님을 이해하려면 독수리님이 어떻게 보이는가가 아니라, 독수리님의 눈에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알아야 한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말입니다. 이는 방랑단을 처음 기획할 때부터, 제가 손안에서 모서리가 닳도록 만지작대던 문장입니다. 지리산님을 이해하기 위해, 어떡하면 지리산님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까? 여러 번 고뇌했지요. 그 결과 방랑단은 지리산의 야생동물님들을 스승 삼기로 했습니다. 차를 타지 않고, 집을 소유하지 않고, 돈으로 밥을 사 먹지 않기로 말입니다. 방랑단 중에는 이미 독수리님과 거의 근접한 눈을 가진 단원도 있었어요. 봄이라는 진돗개님입니다.

  

좌: 산속을 쏘다니는 봄이 / 우: 계곡에서 인간들을 기다려주는 봄이


봄이는 단연 저에게 늘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저와 가장 다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봄이는 돈 없이 길을 떠나는 데에 큰 다짐이 필요하지 않았거든요. 침낭 없이 잠을 자는 것도, 심지어는 산속 깊은 곳에서 잠을 자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는 것도 저보다 압도적인 인내심이 있었고, 산비탈과 바위틈을 뛰어 달려도 지칠 줄을 몰랐어요. 정수된 물이 아니라 강물을 마시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고,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눈과 예민한 귀와 집요한 코를 가졌습니다. 상처가 나면 병원을 찾기보다는 스스로 치유할 줄을 알았어요. 속이 좋지 않을 때면 풀을 먹고 토를 하거나, 온종일 잠을 자서 기운을 회복하는 식이었습니다. 물놀이를 해 본 적이 없는 봄이는, 다른 방랑단원들이 계곡에서 뛰어놀 때면 먼발치에서 우두커니 그들을 기다리곤 했는데요. 어느 순간부터는 봄이도 얕은 물가만 보면 신이 나서 펄쩍 달리며 물장구를 치기 시작했어요. 더위를 식히려면 물과 친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그새 배운 모양이었습니다. 이는 봄이의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야생동물님이라면 누구나 가진 지혜였어요.     


제가 야생동물님들을 닮으려고 노력한 것처럼, 저는 야생동물님들을 저와 다르지 않게 보려고도 애써야 했습니다. 어느 존재를 만나면 꼭 마음속으로, ‘이 존재가 인간이라면?’하는 질문을 던져보았어요. 시골집의 마당에는 꼭 개님들이 아주 짧은 줄에 묶여 있습니다. ‘이 개님이 인간이라면?’ 아마 마을이 뒤집어지겠지요. 비 온 뒤에는 도로가 개구리님과 뱀님과 달팽이님의 시체로 뒤덮입니다. ‘이들이 인간이라면?’ 경찰을 불러서 뺑소니범을 잡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 시체 한 구 한 구를 치워주지 않고는 길을 지나갈 수가 없게 됩니다. 축사의 소님들은 평생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관절염이 생길 만큼 살을 찌우다 ‘고기’로 팔리게 됩니다. ‘이들이 인간이라면?’ 그토록 비극적인 생을 애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인간인 방랑단원들에게도 가장 큰 숙제가 있다면 그것이었습니다. ‘봄이가 인간이라면?’하는 질문 앞에 자주 스스로를 세워야 했어요.     


제가 ‘양배추님’의 ‘님’자를 흐리게 발음하는 것만큼이나, 저의 종차별적 인식은 깨나 그 뿌리가 짙은 안개 속에 있습니다. 저는 빵을 아주 좋아하는데요. 봄이도 빵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이 그 뿌리를 지면으로 끌어올렸어요. 빵을 선물 받는 일은, 걸식하는 방랑단에게는 귀한 기회니까요. 자주 먹지도 못할 그 빵을 보면 냉큼 입안에 다 털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봄이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입맛을 다시며 제가 도저히 못 알아먹지는 못할 분명한 방식으로 의사를 전달해와요. 만약 봄이가 인간이라면, 저는 망설임 없이 꼭 반을 떼어서 나누어 줄 것입니다. 망설인다면 치사해 보일까 봐서요. 반을 갈랐는데 약간 크기가 다르다면, 눈치를 좀 보다가 더 큰 덩이를 건넬 수도 있어요. 아무렴 제 체면이 빵보다는 중요한 모양이죠. 그런데 봄이는 제가 졸렬한 빵순이라는 것을 동네방네 떠들지 않습니다. 손에 든 것을 마구잡이로 뺏지는 않을, 점잖은 개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봄이가 개이기 때문에, 저는 빵을 나누기를 마음껏 망설일 때가 많았어요. 부끄럽지만 말입니다.


좌: 신발장만 허락받은 봄이 / 우: 함께 감자를 나눠먹는 방랑단


빵만이 아닙니다. 빵은 귀여운 수준이에요. 춥고 고된 날, 어느 집에서 자고 가라며 손을 내어주신다면 방랑단들은 고민도 않고 뛰어갑니다. 다만 6명 중에 5명만 재워줄 수 있다고 하셨다면, 아마 그 집에 가지 않을 거예요. 다른 집을 찾아보거나 다 같이 노숙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외되는 1명이 봄이일 때는 조금 달랐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1명은 언제나 봄이였어요. 인간 5명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대개 환영받았고, 봄이는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집 안에 들어서지 못했습니다. 더러운 신발장이나 마당에서 자야 하고, 심지어 낯선 곳에 묶여서 있어야 했어요. 그런 날엔 밤새 봄이는 낑낑대거나, 다음 날 추위에 두 볼이 핼쑥해져 있었습니다. 방랑의 날들이 쌓이고, 봄이와 관계가 깊어질 즘에야 깨달았어요. 이건 평등하지 않다! 내가 봄이에게 저지른 것은 종차별이었다! 라고요. 부끄럽고 부끄러웠습니다. 미안하고 미안했고요. 인간 방랑단원들은 결국 합의를 통해 당연했던 규칙을 재정비했어요. 봄이가 갈 수 없는 곳엔 우리도 가지 않는다. 봄이를 차별하는 것에 동조하지 않는다. 라고요.     


언제나 ‘인간이라면?’의 질문이 적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개님이라면?’하는 질문이 필요할 때도 있었어요. 인간과 개님은 같지만 다릅니다. 다르지만 같고요. 이건 무슨 ‘따로 또 같이’와 같은 아리송한 말인가 싶지만, 이는 중요합니다. 예를 들자면 봄이는 ‘내 땅’에 대한 개념이 인간과 다릅니다. 인간에게 ‘내 땅’은 문서의 형태로 계약된 불멸에 가까운 재산입니다. 저희에게 공간을 내어주신 소위 ‘집주인’ 분들이 저희가 잘 쉬고 있는지 보러 오시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럴 때면 봄이는 우렁차게 짖습니다. 봄이는 그가 방랑단원 5명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내쫓고 싶은 것입니다. 그럼 ‘집주인’ 분들은 대개 불쾌해 하십니다. 봄이가 너무 시끄럽다며 우릴 도로 내보내는 분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봄이에게 ‘내 땅’은 문서로 계약되지 않습니다. 영원불멸의 것도 아닙니다. 봄이에게 ‘내 땅’은 ‘지금, 여기’에 가까워요. 아주 잠시라도 자신과 동료가 쉬고 있다면, 그곳은 봄이가 지켜야 할 영역입니다. 외부인이 오면 자신과 동료를 보호해야 해요. 봄이는 예절교육을 못 받았거나, 어디가 고장 나서 그렇게 목청이 터져라 짖는 것이 아닙니다. 봄이의 규칙대로라면 봄이는 일을 잘 수행할 뿐입니다. 인간과 개의 규칙. 어느 쪽이 옳으냐는 나중으로 하더라도, 개의 규칙이 잘못된 것은 아니란 겁니다. 오히려 인간과 같은 규칙을 정한 야생동물님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간이 돌연변이인 셈이지요. 산속 어딜 가나 봄이의 규칙을 따라줄 거에요. 진짜 황당한 것은 봄이일 겁니다.


좌: '내 땅'을 지키는 봄이 / 우: 함께 목욕하는 방랑단들

   

같지만 다릅니다. 봄이의 갈색 눈동자를 보면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도무지 포개어지지 않는 틈이 저와는 있습니다. 그 한없는 신비를, 그 무구한 영역을 들여다보면 문득 감사함을 사무치게 느낍니다. 내 비인간 친구. 그래, 너는 그 몸으로 태어났구나. 하고요. 그리고 봄이와 함께 방랑한 것은 헤아릴 수 없는 행운이었다고요. 제가 ‘독수리님의 눈’을 찾기 위해 그 문장이 반들반들 해지도록 만지작대고 있을 적에, 지리산님이 저를 갸륵히 여기신 것이 아닌가 생각하곤 합니다. 인간만의 눈으로는 ‘독수리님의 눈’을 찾기가 어려울 테니, 부족한 저에게 스승님을 보내주신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저는 봄이에게서 가열차게 배웠어요. 봄이의 강인함에 경외하기도 하고, 저의 비겁함에 부끄러워하고, 봄이의 인내심에 전율하고, 좁고 낡은 인간 중심의 시선을 더디게나마 깨부숴 나가는 스스로에게 믿음을 보내기도 하면서요. 

     

공유회의 모습들


마침내 말입니다. 개님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을 찾았습니다. 당신 품에서 얻은 배움을 다른 인간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어요. 사 개월의 방랑을 마치고, 인간 방랑단원들이 한 일은 공유회였습니다. 형형한 눈빛을 가진 여러 사람들을 만났어요. 당신이 보여준 것들이 그들의 가슴 속에도 잔잔한 파동을 만들었음을 느낍니다. 그래, 나는 이 몸으로 태어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온 마음을 다해 당신의 메신저가 되겠습니다. '독수리의 눈'을 보내주신 당신께, 존경의 입맞춤을 담아.


빵을 나눠 먹는 법을 배운 칩코 드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