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프롤로그
귀촌했다. 이즈음, 전라도니, 경상도니 제각각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아마 유행했었나. 나야 인간관계가 워낙 좁아서, 친구들이 다 고만고만한 관심사를 가졌지만. 청년 지역살이를 돕는 정책이나 강연이 많아진 변화도 조금은 실감했다.
유행에 편승한 귀촌기를 써볼까 하기엔 내 귀촌기는 남에게 적당한 팁이 될만하진 않았다. 제법 가엽고도 비범한 좌충우돌을 겪었다. 지난 귀촌 생활을 내 브런치에 성실하게는 아니어도 까마득하지는 않게 기록했다. 장아찌를 담그거나 농사짓는 소소한 일상 글의 조회수는 내가 전부이고, ‘찌찌 순례’ 글만 조회수 최고 기록을 또 갱신했다는 알림이 연신 날아왔다. (이름도 어째 '숭한' 찌찌 순례는 차차 설명하기로 하고...)
어쨌거나 내 귀촌 생활은 찌찌 순례로 대표될 만큼 평범하지 않았다. '나는 모아둔 돈도 없고, 경력도 없고, 남편도 없고, 아이 계획도 없는 레즈비언이지만 요놈의 가부장 시골 마을에서 잘 산다!'라는 응원의 귀촌기를 적고 싶은 욕심도 들었다. 돌이켜보면 썩 귀감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라서, 그냥저냥 지나가게 두려 했다.
...아니, 근데 찌찌 순례가 어때서!
다시 미련을 담아 돌이켜보면, 귀촌생활은 나를 완전히 바꾸었다. 이는 내가 왜 귀촌했는지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유행이라고 한들, 모두가 귀촌하지는 않으니까. 나를 시골로 이끈 건 내 몸뚱아리였다. 도시를 떠난 후 내 몸은 찌찌를 포함해서, 엄마도 기함할 만큼 변했다. 도시에서 구겨지고 접혔던 몸은, 시골에서 하루하루 터질 듯한 활력으로 차올랐다.
도시에서 내 몸이 '야성'을 갈구해왔음을 알았다. '야성'. 거창하게 들리니 이를 내 안의 '흑염룡'이라고 해두면 좋겠다. 내 괴이한 귀촌 생활은 내 안의 '흑염룡'을 깨우는 과정이었다. 그냥저냥 지나가게 두기엔, 내겐 자꾸 꺼내 보는 선물상자와도 같았다. 삼 년 전 도시에서의 나처럼, 혹시 ‘야성’이라는 단어에 심장이 두근거린다면, 이 이야기는 퍽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