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각설하고, 커리큘럼의 입문을 추측해 보자면... 난 돈을 아끼는 데 재능이 있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물건 욕심도 없었고, 맛집에도 관심이 없었다. 용돈을 받으면 음흉하게 저장해두기만 했다. 엄마나 아빠가 돈을 하도 힘들게 버시는 걸 봐와서 그런가. 나이에 맞지 않게 모인 큰돈은 백화점에 가서 어버이날 선물로 손을 달달 떨면서 탕진하곤 했다. 스무 살이 넘어서도 학교와 집 말곤 어딜 놀러 다니질 않았다. 서울 지리는커녕 우리 집 근방도 잘 모른다. 돈을 버는 것도 징하게 싫어해서, 아르바이트는 벼랑 끝이 아닌 이상 하질 않았다. 어디 상금 딸린 공모전이나 대회가 있으면 노렸다가 그 상금으로 반년 넘게는 거뜬히 버티곤 했다. 거액의 상금을 탔다기보단, 타는 만큼만 허리띠 졸라매고 생활했다. 적은 돈으로 살아남기는 프로였다고 본다.
내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이 종종 ‘거짓말이겠지’하고 여기는 대목이 있다. 결코 대단한 대목이라서는 아니다. 내가 ‘수능’이라는 것을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알았다는 사실이다. 초, 중, 고등학교 내내 일반 공교육을 수료한 사람치고는 혀를 내두를만한 둔감함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사람들은 내가 웃기려고 하는 말인 줄 알기도 하지만, 그다지 과장은 없는 이야기다. 내가 ‘수능’이란 단어를 처음 인식했을 때는, 나의 큰언니가 이십 대 중반을 향할 즈음이다. 언젠가 언니는 술에 만취한 채 들어와 현관 앞에 쓰러지고는 "세상에 던져졌다"라며 장렬히 잠들었다. 그땐 따라 하며 놀리기 바빴는데. 그로부터 4년쯤 뒤, 나 역시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세상에 던져져 있었다. 늘 한발 늦는 내가 ‘취업’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던 때였다.
물론 ‘수능’이나 ‘취업’ 외에 내가 열정을 가진 것은 따로 있었다. 친구들이 토플 점수에 열을 올릴 때, 나는 깻잎이 찢어지지 않게 씻는 법에 열정적이었다. 그때 내 검색창에는 ‘자급공동체’가 떠 있었다. 취업이 발등에 떨어진 마당에 돈을 안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궁리하던 끝에 기특하게도 ‘자급’을 떠올린 것이다. 당시 나는 비건을 실천하면서 주말 텃밭을 가꾸고 있었다. ‘초보 농부’라는 이름도 아까워서 그냥 ‘농부’는 빼는 편이 나을 지경이던 나는, 엄마가 하라는 대로만 씨를 뿌린 게 전부였다.
여름이 되니 토마토며 가지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을 보고 더없이 감격해버렸다. 세상에 이런 가성비가! 천 얼마 주고 씨앗 한 봉 샀을 뿐인데... 냉장고가 터지도록 수확물이 나왔다. 주말에만 가다 보니 누군가 자꾸 내 텃밭을 눈에 띄게 서리해가곤 했지만, 그런데도 충분한 양이어서 용서가 절로 되었다. 텃밭은 공모전보다도 더 대단한 가성비를 갖춘 것이다. 술값도, 옷값도 필요치 않던 나도 밥값은 필요했으니까. 그런데 이 밥값마저도 덜어준 텃밭은 내 인생에서 ‘취업’이란 글자를 영영 지워버리고도 남을 복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