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꼬리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칩코 Oct 12. 2021

꼬리의 방학

2021년 8월 27일


꼬리의 방학이 끝났다. 꼬리는 내가 머무는 지리산에서 한 달을 보내다, 다시 도시로 갔다. 눈을 뜨면 함께 명상을 하고, 간단한 체조로 몸을 풀었다. 나는 밭일을 하고, 꼬리는 불을 피운다. 일부러 일을 나눈 것은 아닌데 그렇게 됐다. 내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는 밑 빠진 독 같은 할 일 리스트가 있다. 이를 처리하다 보면, 보다 못한 태양이 정수리를 지지고, 손목이 비명을 지를 때쯤에야 정신을 차리고 일을 멈춘다. 그러면 정말 밥 해먹을 힘 한 줌도 남아 있지 않도록 일을 해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쫄쫄 굶다가 기운 차릴 때쯤 또 고생고생해서 불을 피워 밥을 해야 하고, 운이 나쁘면 장작이 다 떨어졌다는 것을 그때야 알게 되는 수가 있다. 물론 이건 꼬리가 떠난 뒤 경험한 것들이다. 꼬리가 있을 때는, 꼬리가 미리 밥을 해두었으니까. 정오의 태양이나 내 삐걱대는 손목보다 먼저 나를 멈춰주었으니까. 꼬리가 떠난 지 고작 일주일도 안되었다. 등에 땀으로 찰싹 붙은 티셔츠, 자꾸 만지작거리는 오른 손목, 밀려오는 허기짐. 꼬리의 방학이 끝났다는 감각은 이런 것들인가. 꼬리보다 서툴게 불을 피우며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 안녕히주무셨나요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