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엄마의 기억 속에 내 리즈시절은 미국칩코이다. 난 어려서부터 위장병이 연례행사였다. 소화 속도도 느리고 체하는 건 다반사다. 일 년에 한 번은 반드시 일주일을 굶어도 나을까 말까 한 지독한 장염을 겪었고, 장염 끝엔 변비가 기다렸다. 염려 대왕이신 엄마는 소화제를 한약과 양약 종류별로 늘 집에 구비 해두셨다. 그런 연약한 딸이 갑작스레 한 달간 미국에 간다니. 빵에 환장하지만, 빵만 먹으면 소화불량이 오는 딸이 빵의 나라 미국에 간다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던 엄마는 소화제를 베개로 써도 좋을 만한 양을 챙겨 주시고서야 마음을 놓으셨다. 그런데 웬걸 한 달 뒤, 구릿빛 피부에 체구가 '벌크업' 된 건장한 딸이 성큼 캐리어를 끌고 오는 모습을 보게 되신 것이다. 미국은 그때 우리 엄마에게 점수깨나 땄을 것이다. 요새도 내가 아플 때면, 그때의 드넓고 그을린 어깨를 가진 미국칩코를 떠올리며 아쉬워하시곤 한다.
미국행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나는 희미한 열정으로 중등교사가 되려고 교직 이수를 받고 있었다. 학창 시절에 반면교사들을 하도 많이 만난 덕이었다. 그러나 교생실습을 다녀오고 별로 뜨겁지도 않던 열정마저 식어버렸다. 당시 나는 채소를 길러 먹는 비건이었고, 샴푸를 안 쓰겠다면서 긴 머리를 싹둑 자른 뒤에도 기름기는 감당을 못하는 숏컷이었다. 탈코르셋 같은 구호도 몰랐지만, 그때부터 무슨 바람이 불어서 화장기 없는 노란 피부 빛과 거무죽죽한 입술 색과 친해지려 노력 중이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학생, 교사나 교생 동료 모두 나와 관심사가 맞는 이를 찾을 순 없었다. 이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개 나의 외모를 향한 평가가 더 많았다. 교과서로만 가르쳐야 하는 국어 과목도 영 재미가 없었다. 학교 급식에 내가 먹을 건 쌀밥과 반찬 한 가지 정도라 살이 쪽쪽 빠졌다. 한편으로, 학생들에게 세련된 교생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어, 떡 진 머리도 감고 입술까지는 색을 낸 뒤 출근했다. 그러면서도 자꾸 외모에 연연하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독했던 교생실습 이후,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다. 물론 공교육 기관에도 나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은 있었겠지만, 당시 나의 외로움은 상당했던 터라 나 같은 사람이 왕창 많은 곳에 나를 던져두고 싶었던 것 같다. 친구가 한 달짜리 미국 단기 어학연수를 신청했다길래, 마냥 재밌어 보여서 따라갔다. ‘비건’이니 ‘노푸’니 다 영어니까 미국엔 나 같은 사람이 많지 않으려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연수하게 될 학교는 미시간주에 있었다. LA나 뉴욕 말곤 모르던 당시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고른 지역이었다. 남부 쪽이 더 멋졌으려나 의미 없는 고민을 하다가, 허겁지겁 영어 회화 팟캐스트나 몇 편 듣고 미시간에 도착해버렸다. 미시간은 과장을 보태 뼈를 묻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바다처럼 수평선 끝이 까마득한 넓은 호수가 있었고, 밤이면 북쪽의 별자리가 눈앞에 성큼 다가와 크고 밝게 빛났다. 학교는 사방이 푸른 풀밭이고, 작은 동물들이 뛰어다녔다. 여름인데도 전혀 습하지 않은 쾌청한 날씨가 날마다 이어졌다.
학교 식당은 비건 코너가 따로 있었다. 학교 인근 식당에서도 "비건이 뭐요?"하는 되물음을 받을 일이 없었다. 외식할 때는 달걀 뺀 비빔밥 아니면 어묵 뺀 떡볶이던 내가, 호강에 겨워 메뉴를 고르는 시간이 늘어났다. 주말에 열리는 파머스마켓도 나 같은 '빵순이' 비건들의 낙원이었다. 수업 시간에 맞춰 규칙적인 식사를 하고, 남은 시간에 내내 풀밭을 쏘다니거나 호수로 놀러 가니 소화제는 가방 저 아래에서 나올 일이 없었다. 그렇게 기대하지도 않던 미국 품에서 장성한 구릿빛 통통 미국칩코가 탄생한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미시간의 작은 마을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가 처음 만난 시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