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학창 시절 공부 안 했다면서 눈이 퀭하던 친구들처럼, ‘취업 적령기’에 이른 동기들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다들 무슨 준비를 하는지 떠들진 않아도, 전시 작전 짜는 군인들 같은 표정이었다. 그중 눈에 띄는 동기가 있었다. 일본인 유학생 K이었는데, 색연필로 아기자기한 그림을 곧잘 그렸다. 나도 그림 그리는 걸 즐기는 편이라, 우린 서로의 SNS를 좋아해 주곤 했다.
K는 졸업 이후, 서울을 떠나 바로 돌아갈 곳이 있다고 했다. 가족들이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연극 미술을 맡아 그림을 그리고, 연극 대본 따위를 번역도 하고, 농사를 지어 밥을 먹으니 돈은 적어도 좋다고 했다. K가 말한 가족들은 혈연이 아니었다. 연극예술을 하는 공동체였다. 일본에 계신 K 아버지(공산당원이시라고 기억한다.)의 권유로 K는 한국의 자급자족 예술공동체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공부하고 싶어 잠시 서울에 온 것이라고 했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 K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 어쩐지 K의 유학 생활이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나는 K를 따라 공동체 식구들을 만나러 갔다. 그 당시 내가 처음 접한 자급 공동체였다. 나는 평생, 회사에 취직해서 핵가족 구성원들과 좁은 아파트에서 사는 삶만을 예시로 보고 자랐다. 다른 형태의 삶의 방식은 듣도 보도 못했고, ‘공동체’의 개념도 없는 상태였는데, 막연히 그들이 내 '드림라이프'를 사는 것처럼 부러웠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차하면 나도 눌러 앉아버릴 계획을 품고 있던지라, 면접 보는 심정으로 약간 긴장해 있었다. 노심초사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그들은 면접관 같은 표정들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에너지가 성능 안 좋은 블루투스 스피커라면, 그들의 에너지는 연극인답게 어디 록 페스티벌 스피커 급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K를 향한 환대를, 그들이 나에게도 나누어주었음을 느꼈다.
떠나는 날 아침, 경험이 많아 보이시는 여자 선생님과 차담을 했다. 내가 원한다면 공동체에 있어도 좋고, 단지 내가 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될 뿐이라고 하셨다. K는 그녀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저보다 그림 훨씬 잘 그리는 친구예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K의 말을 바로잡았다. “K야. 너는 그림을 잘 그린다. 칩코가 잘 그리는 것과 무관하게 너는 그림을 잘 그린다.”라고.
나는 여전히 그 공동체 사람들을 잘 몰랐지만, 공동체에 들어가는 데에는 큰 망설임이 없었다. 무조건 재밌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역시 로맨틱하지 않은 결론은 빨리 말해두는 편이 낫다. 공동체의 인연은 길지 않았다. 때는 바야흐로, 광화문에 “박근혜 퇴진” 구호가 넘실대던 시절. 나는 늘 혼자 시위를 나갔다가 처량하게 물대포를 홀딱 맞고 돌아왔는데, 이젠 K와 함께 나가게 되었다. 공동체 식구들은 총궐기 날엔 서울로 올라오기도 해서, 나는 걸어 다니는 록 페스티벌 스피커들과 동행하게 된 덕에 아주 흥 나는 시위를 했다.
시위가 끝날 무렵, 대기 줄이 롯데월드 수준이던 경복궁역 지하철 화장실에서 사건이 터졌다. 남자들과 여자들의 나란한 줄 행렬에 화장실 입구는 아주 요원했고, 입구 바깥쪽에는 장애인 화장실이 있었다. 그러니까 비장애인 화장실 줄로 장애인 화장실 입구가 가로막힌 모양새였다. 줄이 길었지만, 사람들 분위기는 훈훈했다. 다들 혁명의 분위기에 달아, 서로가 자매 형제로 보이는 기묘한 흥분과 친밀감에 휩싸여 있었다.
공동체에는 십 대 청소년이 한 명 있었다. 그녀는 화장실 입구도 보이지 않는 뒤쪽에서 초조하게 줄을 기다리다가, 결국 못 참겠는지 장애인 화장실로 뛰어들어버렸다. 장애인 화장실 입구에 선 사람들은 웃으며 그녀가 들어가도록 길을 내주었다. 누가 봐도 어려 보이는 양 갈래 머리 소녀가 발을 동동 구르며 줄을 해친 것이나, 장애인 화장실로 뛰어들어버린 것이나, 어찌 됐든 사람들은 아량을 베풀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때 그녀를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던 한 노년 남성이 자동문이던 장애인 화장실의 열림 버튼을 눌렀다. 아마 안에 잠금장치가 있었겠지만, 그녀는 너무 급하게 들어간 나머지 그런 건 안중에 없던 모양이고, 속절없이 자동문이 열려버렸다. 그녀가 변기 위에 바지를 내리고 앉은 모습은 장애인 화장실 앞에 줄 선 그 많은 인파 앞에서 펼쳐졌다. 그녀는 너무 놀라 비명을 질렀고, 사람들의 반응은 어수선했다. 소녀의 비명을 시트콤처럼 코믹하게 보며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터지기도 했고, 어디선가는 "아..."하는 탄식이 들렸다. 버튼을 누른 노년 남성은 귀엽다는 듯이 슬쩍 미소를 지으셨다.
그녀는 옷을 추스르고 화장실에서 뛰쳐나갔다. 난 오줌 마려운 것도 쏙 잊어버리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순간 ‘저건 아니지!’하며 욱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그 절묘한 웃음과 탄식의 분위기에서 화가 터져 나오지는 못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뒤 보니, 그녀는 공동체 언니들 품 안에서 오열하고 있었다. 그제야 난 화를 내야만 한다고 생각해버린 듯하다. 주위를 돌아보며 노년 남성을 찾았고, 인파 속에서 찾을 수 없을 것 같던 그가 딱 눈에 들어왔다. 난 그에게 달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과하세요!!”라고. 그는 몹시 당황해 두리번거리더니, 울고 있는 그녀도 본 것 같았다. 그는 안에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눌렀다며 자리를 뜨려 했다. 난 "웃으면서 누르신 거 다 봤다"고 실랑이했는데, 그때 공동체의 수장이던 남자가 나를 돌려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그만해! 그게 그녀를 위하는 게 아니라고!” 하더니, 공동체 사람들 모두 나를 그 자리에 두고 떠나버렸다.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난 내가 잘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 노년 남성에게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도리어 나에게 화를 내고 떠나버린 그들이 좀 황당했다. 일주일 후 그 수장이 전화로 사과했다. 당신네 공동체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는다고 했다(나에게는 공동체 구성원이 아니라서 소리를 질렀는지 모르지만). 그녀가 나에게도, 자신에게도 고마워했으므로 이만 마무리 짓자고 했다. 관계를 회복할만한 대화는 아니었다.
나는 그 사건 이후 아주 오랫동안 혼란스러웠다. 당시 나는 페미니즘이란 단어도 잘 몰랐다. 다만 공중화장실에서 메갈리아가 붙인 스티커들을 보며, 이런 주장은 무슨 의미일까 하며 알쏭달쏭해 하던 수준이었다. 내가 아는 똑똑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수소문해봐도, 다들 모르겠다고만 했다. 그 남성이 발뺌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둥, 그 여자애도 장애인 화장실 이용한 거부터 잘못 아니냐는 둥.
정말 노년 남성은 사과할 필요가 없었을까? 그녀가 느꼈을 모멸감과 성적 불쾌감은 어떻게 해소되어야 했을까? 자유와 평등을 위해 모였던 그 많은 사람은, 어릴 적 고무줄 끊는 장난을 보듯이 노년 남성을 지켜봤던 사람들은, 누구도 그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액션을 취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녀는 어떻게 했어야 덜 상처를 받고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있었을까?
내가 공동체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마냥 그 사람들과 서먹해져서만은 아니었다. 나는 두려웠다. 나는 머릿속으로 수십 번은, 자동문이 열리며 수십 개의 눈동자가 바지를 내린 여성에게 쏟아질 그 장면에 나를 세워보는 것이었다. 그 여성이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두려움, 그때 터져 나오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울면서 도망치게 될 수도 있었다는 두려움, 내가 그 남성에게 분노하면 공동체 식구들이 나를 저지할 것이라는 두려움,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물론 가해지목인에게 화를 내고 처벌하는 것이 정답이 아니란 것을 안다. 그들은 그 순간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녀 역시 자신을 지키는 최선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무엇이 정답인지도 몰랐지만, 내 두려움이 상쇄되진 못했던 모양이다. 그저 막연히 바랐다. 내가 목도한 현실보다, 조금 더 지혜로운 대처방식을 알려줄 만한 공동체면 좋겠다. ‘자급 공동체’를 찾아 헤매던 내 안에, ‘여성으로서 안전한 자급 공동체’가 있을까? 하는 질문이 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