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야생동물은 인간을 피한다. 아주 가끔, 인간을 피하지 않는 이를 만난다. 이제 막 날갯짓을 연습하는 아기새였다. 그 새는 내 머리 위에도 올라가 보고, 손도 궁금해하며 이리저리 쪼아보았다. 손바닥에 솜털이 굴러다니는 것처럼 가볍고 부드러웠다. 전에 친구의 어깨 위에 다른 아기새가 올라가서 노는 것이 부러우면서도 신기했는데, 나에게도 그런 행운이 왔다. 아무 먹이도 들고 있지 않은 인간에게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새는 대개 어린 새이다. 경험이 쌓이면 새는 인간을 가까이하면 좋지 않다고 학습한다. 아기새는 용감하고, 어미 새는 지혜롭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르면 용감해진다. 내가 맹랑한 짓을 했을 때는 보통, 어른들이 해주는 “내가 다 해봤는데” 부류의 조언이 들리지도 않을 때였다.
나는 돌연 프랑스로 떠났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날 프랑스로 이끈 게 어떤 것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이제 엄마 집을 떠나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고, 집을 떠나지 않을 거면 번듯한 직장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건 관심 밖이었다. 자급 공동체로 들어가겠다던 포부는 경복궁역 화장실에서 좌절되었고, 임용고시 공부는 교생 실습 이후로 학을 떼었다. 미국에서의 경험이 썩 나쁘지 않았던 터라 해외로 가보고 싶었는데, 내가 좋아하던 문학이나 영화가 다 프랑스산이었다. 문화 식민지하의 여느 나라 사람이 그렇듯, 프랑스를 향한 환상도 있었다. 나를 채식주의자로 만든 그 멋진 여성 교수님이 프랑스에서 유학하셨다던 소문도 한몫했다. 미국은 비자를 받으려면 3천만 원이 통장에 있다는 증빙이 필요했는데, 프랑스는 1천만 원이면 되었다는 점도 이유라면 이유였다.
돈도 없고, 연고도 없고, 심지어 언어도 되지 않은 채로 프랑스로 떠난 것은 무모했다. 프랑스 유학 커뮤니티 카페에서는 “내가 다 해봤는데” 유의 조언으로, “언어는 무조건하고 가라”고 신신당부가 차고 넘쳤다. 나는 원래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실패 경험 쌓기에 최적의 성향이었으므로 기초 회화책 한 권만 달랑 읽어보고 프랑스로 향했다. (무모하고 용감했던 그때의 나와 달리 지금의 나는, 누군가 언어 공부 없이 프랑스로 간다고 하면 절대 만류할 어미 새가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비자를 연장하지 못해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 집을 구하지 못해서 쫓겨날 위기의 연속이었다. 프랑스의 인종차별로 레프트훅, 국수주의로 라이트훅을 두들겨 맞고 1년 만에 귀국해버린 것이 결말이다.
일전에 내 삶이 완벽한 커리큘럼대로 날 이끌어주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겁을 상실했던 탓에(?) 눈물의 경험을 왕창 쌓았고, 망망대해에서 삶의 키를 잡을 수 있었다. 프랑스행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리산으로 향하는 가장 큰 동기가 되었다. 미시간의 작은 마을이 내게 첫 시골 생활이었다면, 프랑스의 남부 도시 보르도는 내게 첫 지역 생활이었다. 나는 지역 차별을 잘 몰랐다. 인천은 분명 지역이지만 조금 애매하다. 2시간만 지하철을 타고 가면 서울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서울에 상경해서 “사투리 고쳐야겠다.”라든가, “서울 사람이 다 됐네.” 등의 해괴한 말을 들었다면 지역 차별에 더 빨리 민감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저 멀리 프랑스에 가서야 비로소, 서울 공화국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