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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칩코 Feb 20. 2022

브래지어를 하지 않으면 죽을 지도 몰라

<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한국에서 겁도 없이 '탈브라'를 한 건, 미국칩코가 미국 맛을 어설프게 보고 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아 술집에 잘 가지 않는다. 나의 친언니인 차라는 술도 좋아하지만, 특히 술집을 좋아하므로 내가 술집에 가는 건 차라와의 약속이 유일하다. 인터넷이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들썩이던 때였다. 여성이 남성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놀라운 것이 없는 다반사이므로)보다, 그게 당연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사람들을 들썩이게 했다. 이 참사를 ‘여성혐오’라고 부르는 것이 불편한 이들이 많은 듯했다. 나로 말하자면, 잘 몰랐다. 여성이라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은 내게 너무 익숙한 광경이라서, 그것을 낯설게 보기가 되레 낯설었다.


우리 옆 테이블에서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졌다. 그들은 내가 인터넷에서 본 반응처럼 이 사건을 감히 ‘여성혐오’라는 괴상한 이름으로 불러서 화가 나 있었다.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 내 젖꼭지에 신경을 썼고, 사람들이 남성의 젖꼭지에는 무관심하나 여성의 젖꼭지에는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술집이라는 장소가 친숙한 사람도 아니었다. 하필 쉬가 마려운데, 화장실이 바깥 복도 후미진 곳에 있었다. 뉴스에서 본 그 피해 여성이 죽은 화장실이랑 비슷하게 보였다. 화장실을 가다가 누굴 마주치면, “여자가 왜 옷을 그따위로 입고 다녀?”라거나, “너도 강남역 살인사건을 여성혐오라고 생각하지?”라거나, 아니면 그냥 “여자네?”하고 죽임을 당할 것도 같았다. 망상에 가까운 두려움이었지만 내 망상이 이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현실이 되었다는 뉴스가 자꾸 들렸다.


피해 여성이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서 참변을 당한 건 아니었지만, 나는 자꾸 내가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서 죽임을 당할 것 같았다. K는 특히나 내 젖꼭지를 불쾌해하던 사람이었다. 하루는 혈연가족끼리 식사하고 K만 술에 취한 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K가 갑자기 내 웃옷을 확 들치었고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가슴이 드러났다(엘리베이터엔 가족만 있었다.) “너 브래지어 안 하고 다니는 거 내가 아주 불편하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K 식의 방법이었을 테다. 나는 “씨...”라는 반자동 음성과 경멸을 담아 그를 쳐다봤고, 그 눈빛은 술 취한 K의 화를 돋우기에 제격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K는 물건들을 때려 부쉈고, 나는 그런 모습을 처음 본 것은 절대 아니었으나 처음으로 K를 경찰에 신고했다.


K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자해했다. 나를 경찰에 신고하다니... 내가 이런 사람이라니... 하면서 벽에 머리를 박으며 울부짖었다. 경찰은 와서 가여운 K를 달래주고 갔다. 내가 눈물 한 방울 안 흘려서 그랬나, 나한테는 K에 잘하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 오줌을 참고 참다가 차라도 화장실을 갈 타이밍에 함께 일어선 그날 이후였는지, K가 나를 성추행(K가 이 방식으로 말을 걸 수밖에 없던 많은 맥락이 있었겠지만, 이 사건은 성추행이라고 나는 부르고 싶다.)한 날 이후였는지, 내 어깨는 굽고 굽다가 결국 다시 와이어 없는 브래지어를 찾았다. 어쩐지 굴욕적인 기분이었다. 그러나 내 젖꼭지가 주변 사람들의 눈을 더는 찌르지 않는지, 이제 불편한 소리가 멈추었다. 엄마도 미국물 벗은 딸이 편안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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