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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칩코 Sep 30. 2022

단순한 삶의 지도

<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방랑단의 일과는 걷는 일이 대부분이다. 지리산 둘레길을 주로 걷지만, 그에 못지않게 도로도 자주 걷는다. 시골은 도보나 자전거 도로가 형편없다. 차들은 또 얼마나 거칠게 달리는지. 도로는 무더운 햇빛이나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피할 나무 그늘도 없다. 오래 걸으면 발목과 무릎도 더 아프다. 잠시 걸음을 쉴 때도, 푹신하고 시원한 풀밭과는 비교가 안 된다. 한여름의 아스팔트는 최고 60도까지 오른다. 신발을 신는 나 같은 동물도 힘든데, 그렇지 않은 동물은 발바닥 화상을 입기도 한다. 큰 차가 지나갈 때는 몸이 휘청이고, 더운 매연이 훅 얼굴을 덮치고, 목구멍도 아프다. 도로는 자동차에만 안락한 길인 것 같다.


ⓒ아영


봄이는 읍내에 가면 긴장한다. 자동차가 쌩쌩 달리고,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커다란 건물에서 시끄러운 음악이 쏟아져 나오고, 갑자기 자동문이 열려버린다. 읍내에선 봄이가 아는 것이 아주 적어진다. 왜 인간 동물만 이렇게 많이 사는지, 왜 흙과 풀이 이리도 없는지, 나무들은 왜 일정한 간격으로만 심어져 있는지. 봄의 유전자 속에 축적된 유구한 지혜 속에서는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것들. 봄이는 꼬리를 다리 사이로 숨기고 분주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걷는다. 그런 봄이를 볼 때면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낯선 행성에 불시착한 외계인이 지을 법한 표정이다. 미국 여행을 할 때, 친구를 따라간 파티 자리에서 나도 꼭 저런 표정을 지었다.


봄이는 산을 달릴 때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는다. 수없이 달려 본 길을 가듯 겁도 없이 질주한다. 저 아래 비탈에서 부스럭 소리만 나면, 튼튼한 뒷다리로 껑충 달려가 낙엽 속으로 풍덩 빠진다. 그곳에 숨어 있던 꿩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봄이가 잡을 수 없는 높은 곳으로 날아간다. 숲속에서의 모든 과정은 봄의 유전자 속에 있다. 봄이는 누구보다 잘 안다. 자신이 얼마나 빠르게 달릴 수 있는지, 턱으로 얼마나 단단한 것을 부술 수 있는지, 자신이 이 숲에서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방랑단의 일과가 걷는 일이 대부분이라서 그런지, 방랑단의 하루엔 꼭 로드킬이 있다. 내장이 다 쏟아져 끔찍하게 뭉게진 시체, 몸이 토막 나서 허벅지는 저 멀리 떨어진 시체, 바퀴에 빳빳하게 눌려서 종잇장처럼 떨어지는 시체, 방금 막 죽었는지 몸의 온기가 남아있는 시체, 석고상처럼 굳어있는 시체. 방랑단 이전까지는 도로를 자주 걸은 적이 없어서인지, 로드킬이 이렇게나 많은 줄 몰랐다. 시체를 치우는 건 역시 유쾌하지 않았다. 가끔은 그냥 모른 척하고 싶기도 했다.


하동의 악양면에는 동정호가 있다. 관광지로 많이 찾아오는 인공호수이다. 이곳은 원래 밭으로 이용되던 축축한 땅이었다고 한다. 섬진강의 둑을 쌓기 전에는 물이 이따금 범람하곤 하는 지대에 속했단다. 동정호에는 두꺼비들이 산다. 섬진강의 '섬'이 두꺼비 섬(蟾) 자라는 것을 나는 그제야 알았다. 두꺼비들은 지리산의 끄트머리 자락인 고소성 군립공원에서부터 이곳 동정호까지 내려와서 알을 낳는다. 동정호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섬진강까지 내려갔으려나. 두꺼비와 같은 양서류가 왜 '양서류'라고 불리는지도 그제야 알았다. 물과 육지 양쪽에서 서식하기 때문이란다. 두꺼비는 지리산과 섬진강을 이어주고 있었다.


ⓒ아영

동정호와 고소성 군립공원 사이의 도로는 봄철만 되면 두꺼비의 시체로 뒤덮인다. 봄철에 두꺼비들은 알을 낳기 위해 물가로 내려간다. 산과 물가 사이는 도로가 가로놓였고, 그 도로를 미처 건너지 못하고 두꺼비들은 알을 품은 채 죽어버린다. 이후 두꺼비 로드킬 문제가 대두되어 도로는 초록색으로 칠해졌다. 속도를 줄이라는 문구도 크게 게시됐다. 방랑단을 하면서 양서류 시체도 많이 보았는데, 내 엄지 손톱보다 작은 아기 두꺼비 시체는 치우기도 곤혹스럽다. 몸이 말랑해서인지 바퀴에 눌리면 이게 두꺼비였는지 가물거릴 지경이다.



두꺼비들의 유전자 속에 기억된 리스트에도 아마 도로는 없었을 것이다. 봄의 유전자 속에 자동문이 없던 것처럼. 아주 먼 옛날부터, 인간들이 섬진강을 섬진강이라고 부르기 훨씬 이전부터 두꺼비들은 지리산과 섬진강을 오가며 알을 낳았을 것이다. 그들의 단순하고도 명료한 삶의 지도에는 '봄철에는 강가로 가라'라는 문구가 적혀있었을 테니까. 두꺼비들이 아무리 빨리 달아나도 피할 수 없을 속도로 자동차들이 쏟아지는 도로에 대한 정보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두꺼비들이 겪었을 어리둥절함과 쓸쓸함을 상상해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당황스러움을 채 느끼기도 전에 바퀴에 깔려버렸을 두꺼비들. 인간 동물 손가락 하나만 도로에 나뒹굴어도 뉴스에 난리가 날 텐데, 어떤 죽음들은 온몸의 피부가 터져서 납작해진 채 도로를 뒤덮어야 주목받는다. 봄이가 숲속에서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는 것처럼, 두꺼비들도 어떤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능수능란한 존재일 것이다. 아마 그 세상은 지금 이곳보다는 단순할 것이다. 오늘 꼭 끝내야만 하는 서류도, 오후 5시까지 늦지 않게 도착해야 하는 회의도, 무엇을 짓밟고 있는지 인지도 못 한 채 꼭 자동차로 달렸어야 하는 어떤 이유도 없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로드킬 시체를 살피려 땅만 보고 걷다 보면 짓눌린 과일에도 깜짝 놀라곤 한다. 어느덧 황금빛이 된 매실들이 땅을 뒹굴던 철. "요새 떨어진 것들은 다 매실이라고 보면 돼. 집집이 매실만 담그는 철이잖아."라고 한 할머니는 말씀해주셨다. 집마다 설탕을 켜켜이 부은 매실이 익어간다. 엄마는 도시에 살면서도 이 철만 되면 매실을 담그신다. 왜 담그냐고 물으면, "몰라. 이 철에는 매실을 담가야 해"라고 하신다. 지난 생에 수없이 매실을 담가온 할머니의 유전자들이 엄마의 몸에도 흐르는 모양이다.


이 철에는 매실을 담가야 해. 두꺼비들이 때가 되면 물가로 내려가듯이. 우주의 별을 헤아리는 것만큼 복잡하고 어려운 생태계의 비밀이 있겠지만, 그건 단순한 삶의 지도에는 적히지 않았다. 나는 방랑단이 끝난 이후 지금까지, 로드킬 시체를 보면 절대로 모른 척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가끔 너무 바쁠 때는 지나쳤는데 '이 사체가 사람이었어도 내가 지나갔을까?' 하고 스스로 물었다. 언제나 답은 단순했다. 망설이기를 멈추고, 눈을 꾹 감고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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