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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칩코 Sep 30. 2022

계곡에서 수영하는 법

<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물을 무서워한다. 수영장에서는 곧잘 수영은 하지만, 계곡이나 바다는 영 무서워서 수영하지 못한다. 수영장과 달리 자연의 물은 예측 불가하게 움직여서 무섭다. 물속에서 눈을 뜨지 못해도, 바닥이 잘 보이지 않아도 무섭고, 미끈거리는 이끼도 무섭다. 방랑하면서 계곡에 갈 일이 많았다. 특히 여름부터는 도무지 더워서 낮에 걸을 수 없었다. 그럴 때면 아침과 저녁에 부지런히 걷고, 낮에는 계곡 가에 드러누워서 잠을 잤다. 방랑이 끝날 무렵 나는 계곡과 사랑에 빠졌다.


여름 계곡은 천국이다. 그늘이 딱히 없어도 서늘한 바람이 불고 계곡 근처엔 모기도 없다. 물가에 발을 담그거나 경쾌한 물소리만 들어도 더위가 가신다. 하도 더우니 하루에도 두세 번은 계곡에 몸을 흠뻑 담갔다. 몸이 찌르르할 만큼 계곡물은 시원하다. 계곡은 다양하게도 생겼다. 어떤 계곡은 물이 초록색이고 어떤 계곡은 푸른색이다. 어떤 계곡은 이끼가 있고, 어떤 계곡은 물살이가 있다(물고기의 대체어). 높다란 폭포와 이어진 계곡도 있고, 공룡알만 한 바위틈 사이로 흐르는 계곡도 있고, 관목숲 사이로 자잘한 돌과 함께 흐르는 계곡도 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방랑단 때부터 나는 홀딱 벗고 계곡에 들어갔다. 나중에는 숙소를 얻어도 욕실에서 샤워하지 않고 꼭 계곡에 가서 샤워했다. 계곡의 온도가 아니면 영 속이 풀리지 않았다. 랑 중에 우리에게 숙소를 내어주셨던 한 주민분도 해가 질 무렵이면 집 앞 계곡으로 목욕바구니를 들고 가셨다. 집에 욕실이 버젓이 있는데도! 그 분도 아마 계곡의 온도에 중독되셨음이 틀림없다. 지리산의 야생동물들도 이 계곡 때문에 산 속에 사는 게 아닐까? 야생동물에게 하루라도 도시 상수도를 먹여보면 이건 물맛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귀한 계곡물을 팬티 한 장이라도 사이에 두고 만날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이어야 온몸으로 물과 대화를 하는 기분이었다. 방랑단 친구들도 종종 나와 같이 발가벗고 놀았다. 사람이 많은 계곡에서는 하지 못했지만, '기억 산책'으로 놀러 오는 방랑 단원들과 계곡에 갈 때는 벗을 수 있었다. 기억 산책 방랑 단원은 인원은 많았지만 그래도 단골손님처럼 와주는 분들이 많아 어느 정도의 신뢰가 있었다. 그들 앞에서 내 맨몸을 보여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내 맨몸을 보는 것이 괜찮았느냐... 하면 그건 물어봐야겠다. 그러나 방랑단원들은 대체로 우리와 닮아서인지 불쾌해하는 사람은 없던 것 같았다. 아예 모르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본다면 신고할 수도 있었지만. 딱 한 번, 내가 기억 산책에서 맨몸으로 계곡에 뛰어드는 걸 본 N은 내게 물어보셨다. 굉장히 조심스럽고도 예의 있게 이야기를 꺼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목욕탕처럼 발가벗고 계곡에 들어가는 사람은 처음이었다면서, 어떤 생각으로 그러했는지 말해줄 수 있느냐고 했다.


방랑단은 SNS에도 종종 발가벗고 노는 사진을 올리곤 했는데, 내 친언니 S도 의아해하며 물었다. 여자도 남자처럼 웃통을 벗을 수 있는 건 알겠는데, 대체 왜 팬티까지 벗냐면서 말이다. 남자도 사람들 앞에서 팬티는 입지 않으냐고 말이었다. 설명하자면 나도 좀 웃음이 나긴 하다만... 내가 벗는 이유는 봄이 때문이었다. 봄이는 옷을 입지 않고, 당연히 계곡에도 맨몸으로 들어가지 않나.


나는 야생동물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싶었다. 샤워하고 싶은데, 남들이 본다고 나마저 내 몸을 음란물로 볼 것은 없지 않나. 나도 한 명의 지리산의 동물이고, 평소에 옷을 입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였다. 적어도 물에 들어갈 때만큼은 옷이 젖으니까 발가벗는 편이 자연스러웠다. 샤워할 때 팬티를 입고 샤워할 수는 없으니까. 내 귀엔 이 이유가 꽤 합리적으로 들린다. 방랑단이 SNS에 나체 사진을 꽤 자주 올린 것 치고 우린 딱히 일기에다 이유를 적지 않았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그랬다. 분명 이유도 모르고 우릴 수상하게 생각한 사람들도 많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꽤 많았다면 어떠신가!


맨몸 사진을 보고 일종의 응원(?)을 보내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그들은 아무런 설명 없이도, 대개 우릴 보고 해방감을 느꼈다고 했다. SNS의 메시지로 사진이 멋지다고 칭찬해주거나, 실제로 만났을 때 우리의 행동이 아주 자연스러워 보인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들도 함께 옷을 벗기도 했다. 나에게 정중히 이유를 물었던 N은 나의 대답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 귀에도 아마 조금은 합리적인 이유로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를 향해 진실하고 깊은 이해의 눈빛을 건넸다.


어떤 시선들은 우리를 자꾸 껴입게 한다. 나를 숨기게 하거나 다른 모습으로 꾸미게 한다. 그러나 적어도 방랑단 때 내가 받은 시선들은 나를 맨몸이어도 괜찮게 만들었다. 계곡에 머리 꼭대기까지 몸을 담그면 온몸에서 물의 감촉을 느낀다. 닿는 것도 같고, 스치는 것도 같고, 누르는 것도 같지만 결코 나를 상처 내지 않는 신비로운 감촉! 여전히 물은 조금 무섭지만, 물은 언제나 내게 친절다. 방랑이 끝난 후 나는 계곡에서도 수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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