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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칩코 Oct 01. 2022

자, 이제 내가 당신을 위해 뭘 하면 좋을까

<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방랑단에게 식사나 잠자리를 내어주신 분들께 말이다. 말만 그럴 것이 아니고, 밥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고 이불을 반듯하게 개고 바닥을 걸레질까지. 확실한 에프터 서비스가 있어야 베풀어주신 마음에 보답할 수 있다. 기억 산책에 놀러 오는 새로운 방랑 단원과도 존댓말 한다. 물건을 빌릴 때도 "저 물안경 써봐도 돼요?"라고 허락을 구하거나, 몸을 만질 때도 "돌이 미끄러우니, 제 손을 잡으세요"라고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면 이 정도는 상식으로 통한다. 그렇다면 자연과 좋은 관계를 맺는 방법도 다르지 않다.


방랑이 끝나가는 7월 무렵부터 방랑 단원은 만물에 존대하기 시작했다. 문득 이런 깨달음에 이르렀다. 우리에게 밥과 잠자리를 내어준 자들은 사람만이 아니었다는 사실. 매일 우리가 빨래하고 샤워하던 계곡도, 향긋한 봄나물과 여름꽃도, 맑은 공기와 시원한 바람도 다 그냥 주어지지 않았다는걸. 무전으로 여행하면서 가장 멋졌던 것은 사람들의 순수한 베풂이었다. 돈으로 하는 거래가 아니라, 우리가 물질적인 대가를 주지 못하는 형편임을 알면서도 그저 내어주시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나눔으로써 스스로 기쁨이란 대가를 선물할 줄 알았다. 아마 우리가 돈으로 여행했다면 보지 못했을 마음이었다. 그런데 자연은 언제나, 한순간도 빠짐없이 우리에게 그러고 있었다!


나는 사랑이란 '주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주기만 하고, 받기는 바라지 않는 것. 돌려받지 못하면 언젠가는 사랑이 고갈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순수하게 내어줌으로써 오히려 우리는 어떤 보상을 받는다. 나중에 천국에 가서 받지 않는다. 사랑을 베푸는 바로 그 순간에 내 안의 샘물처럼 솟아나는 즐거움이 그 대가이다. 그 샘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법은 스스로 하기에 달려있다.


방랑을 하면서 이 지구가 더없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아침마다 내 삶에 찾아오는 태양이라는 손님이 내게 감격스러운 빛과 온기를 선물해준다는 사실. 햇빛이야말로 사랑의 현신이 아닐까 싶었다. 어떤 대가도 없이 이런 따스함을 주다니. 그런데 그 햇빛을 먹고 자란 나무와 풀은 또 우리에게 밥과 약이 되어준다. 사랑을 듬뿍 먹고 자란 이들은 사랑을 베푸는 법을 배운다. 태양이 사랑으로 키워낸 생명이 이 지구에 가득하다니. 지구가 이토록 낭만적이다.


우리는 만물에 '님'자를 붙이기로 했다. 수를 헤아릴 때도 '옥수수 한 개'나 '꼽등이 한 마리'보다는 모두 목숨 명자를 써서 '한 명'이라고 세었다. 계곡물님을 만나면 먼저 인사했다. 그리고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허락을 구한다. 허락하시면 신나게 헤엄치고 놀았다. 다 논 이후에는 감사를 드렸다. 감사의 표시로 쓰레기가 있다면 주웠다. 산을 오를 때는 한 발짝 걸을 때마다 흙님과 낙엽님에게 인사했다. 산딸기 나무님을 마주치면 인사를 한 뒤, 열매를 먹어도 되겠느냐고 여쭈었다. 식사 때에는 감사를 드려야 할 분들이 넘쳤다. 옥수수님, 감자님, 포도님, 복숭아님... 늘 간식을 주신 사람들에게만 감사를 해왔지만, 사실 옥수수님은 옥수수인 자신이 주인이다. 주인에게 먼저 감사를 드린 후, 그를 모셔서 온 분에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 허락을 구하면, 대부분 생명은 우리에게 자애로웠다. 기꺼이 우리의 요청을 받아주셨다.


물론 거절도 있다. 가령 나무를 벨 때, 새가 먼저 둥지를 틀었다면 거절의 의미. 약초를 캘 때, 그 약초가 마지막 한 줄기 남은 약초여도 거절의 의미. 사람의 언어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귀를 잘 기울이어야 한다. 난 동물만 말하는 줄 알았는데 지리산의 모든 존재가 말을 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바람과 만나면 나는 말할 수 있다. 바람이 없으면 말할 수 없지만, 지금도 바람이 끊임없이 몸속을 통과해 불기에 내가 숨 쉴 수 있다. 그 바람이 우리의 입 속 구조와 마찰이 생기면 말의 형태로 소리가 발생한다. 나무와 돌과 강과 산이 모두 말을 한다. 내가 바람으로 말하듯이 그들도 바람과 만나면 비로소 목소리를 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왜 우리 귀에 들리는지 생각해보시라! 숲속을 걸으면 고요한 소란스러움이 귀를 채운다. 꼭 노래처럼도 들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숲에서 노래하는 존재가 새들만이 아니다.


ⓒ아영

부모가 아이에게 하나하나 말과 표정을 알려주듯이, 지구도 우리에게 순간마다 말과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아이가 점차 부모를 깊이 이해하듯이, 우리도 조금씩 지구의 표현을 익힌다. 무더운 날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막을 오를 때 저 멀리서 솔향을 실은 바람이 불어오면 미소가 절로 난다. 그 순간 나만 미소 지은 게 아니다. 솔바람이 먼저 나를 향해 웃었고 내가 그 표현을 이해한 것이었다. 내 눈앞에 보이는 벌레 한 명이나 물방울 하나도 아무 이유 없는 존재는 없다고도 여기게 되었다. 지구의 표정은 모두 사랑스러웠다. 사랑 가득한 선물을 받고 나면, 확실한 에프터 서비스를 다시금 생각한다. '자, 이제 내가 당신을 위해 뭘 하면 좋을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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