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만물에 존대한다. 다른 친구들은 몰라도 나는 퍽 진지했다. 이제껏 굴어온 무례를 사죄하지 않으면 현생의 재수가 덜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만큼. 사명감을 느꼈달까. 이제는 모든 존재와 말이든 마음이든 어떤 절차를 거쳐서 대화해야 한다고 여겼다.
여전히 낯선 사람과 말을 할 때면, ‘양배추님’이라든가 ‘지렁이님’의 단어 끝을 어쩔 수 없이 흐리게 된다. 인간에게 우습게 보일까 봐 염려하느라, 양배추님이나 지렁이님을 하대하는 쪽을 택한다. 양배추님보다 인간의 눈치를 더 살핀다는 게 비겁하긴 하다. 어떤 점이 우습게 보일 것 같으냐 하면, 만물에 존칭하는 습관은 꼭 유별난 생태 감수성을 가진 사람처럼 보여서... 남들이 나를 대단한 생태주의자로 보고 기대했다가 실망할 것이 미리 부담된다. 나는 ‘파리님을 내쫓아야겠다’ 식의 문장도 곧잘 내뱉고야 말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아직 못 따라갔다.
‘독수리님을 이해하려면 독수리님이 어떻게 보이는가가 아니라, 독수리님의 눈에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알아야 한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말이다. 이는 방랑단을 처음 기획할 때부터, 손안에서 모서리가 닳도록 만지작대던 문장이다. '지리산님을 이해하기 위해, 어떡하면 지리산님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까?' 여러 번 고뇌했다. 그 결과 방랑단은 지리산의 야생동물님을 스승 삼기로 했다. 그러나 방랑단 중에는 이미 독수리님과 거의 근접한 눈을 가진 단원도 있었다. 봄이라는 진돗개님이다.
봄이는 단연 나에게 늘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나와 가장 다르기 때문이다. 봄이는 돈 없이 길을 떠나는 데에 큰 다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침낭 없는 잠자리도, 심지어는 산속 깊은 곳의 잠자리마저 두려워하지 않았다. 추위와 배고픔에도 나보다 압도적인 인내심이 있었고, 산비탈과 바위틈을 뛰어 달려도 지칠 줄을 몰랐다. 정수된 물이 아니라 강물을 마시는 행위가 더 자연스러웠고,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눈과 예민한 귀와 집요한 코를 가졌다. 상처가 나면 병원을 찾기보다는 스스로 치유할 줄을 알았다. 속이 좋지 않을 때면 풀을 먹고 토를 하거나, 온종일 잠을 자서 기운을 회복했다.
물놀이를 해 본 적이 없는 봄이는, 다른 방랑 단원들이 계곡에서 뛰어놀 때면 먼발치에서 우두커니 그들을 기다렸다. 어느 순간부터는 봄이도 얕은 물가만 보면 신이 나서 펄쩍 달리며 물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더위를 식히려면 물과 친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그새 배운 모양이었다. 이는 봄의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야생동물님이라면 누구나 가진 지혜였을 것이다. 나는 시시때때로 봄을 부러워했는데, 다른 방랑 단원 친구들은 내가 또 봄을 질투한다면서 깔깔대곤 했다. 아무리 친구들이 웃어도, 나는 봄의 야생성을 동경과 모방의 대상으로 여겼다.
내가 야생동물님을 닮으려고 노력한 것처럼, 나는 야생동물님을 나와 다르지 않게 보려고 애썼다. 어느 존재를 만나면 꼭 마음속으로, ‘이 존재가 인간이라면?’하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시골집의 마당에는 꼭 개님들이 아주 짧은 줄에 묶여 있다. ‘이 개님이 인간이라면?’ 아마 마을이 뒤집어질 것이다. 축사의 소님들은 평생 원치 않게 임신하고, 정신병과 관절염이 생길 만큼 살을 찌우다 ‘고기’로 팔린다. ‘이들이 인간이라면?’ 그토록 비극적인 생을 애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인간인 방랑 단원들에게 가장 큰 숙제였다. ‘봄이 인간이라면?’하는 질문 앞에 자주 자신을 세워야 했다.
‘양배추님’의 ‘님’자의 흐린 발음만큼이나, 나의 종 차별적 인식은 깨나 그 뿌리가 짙은 안개 속에 있다. 나는 빵을 아주 좋아하는데, 봄이도 빵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이 그 뿌리를 지면으로 끌어올렸다. 빵을 선물 받는 기회는, 걸식하는 방랑단에게는 귀하다. 자주 먹지도 못할 그 빵을 보면 냉큼 입안에 다 털고 싶어진다. 그러나 봄이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입맛을 다시며 내가 도저히 못 알아먹지는 못할 분명한 방식으로 의사를 전달해온다. 만약 봄이 인간이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꼭 반을 떼어서 나누어 줄 것이다. 망설인다면 치사해 보일까 봐서다. 반을 갈랐는데 약간 크기가 다르다면, 눈치를 좀 보다가 더 큰 덩이를 건넬 수도 있다. 제 체면이 빵보다는 중요한 모양이다. 그런데 봄이는 내가 졸렬한 '빵순이'라고 동네방네 떠들지 않는다. 손에 든 빵을 마구잡이로 뺏지는 않을, 점잖은 개이기도 하다. 그렇다. 봄이가 개이기 때문에, 나는 빵을 나누기를 마음껏 망설일 때가 많았다. 부끄럽지만 말이다.
빵은 귀여운 수준이다. 춥고 고된 날, 어느 집에서 자고 가라며 손을 내어주신다면 방랑단은 고민도 안 하고 뛰어간다. 다만 6명 중의 5명만 재워줄 수 있다면, 아마 그 집에 가지 않을 것이다. 다른 집을 찾아보거나 다 같이 노숙했을 테다. 그 소외되는 1명이 봄일 때는 조금 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1명은 언제나 봄이었다. 인간 5명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대개 환영받았고, 봄이는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집 안에 들어서지 못했다. 더러운 신발장이나 마당에서 자야 하고, 심지어 낯선 곳에 묶여 있어야 했다. 그런 날엔 밤새 봄이는 낑낑대거나, 다음 날 추위에 두 볼이 핼쑥해졌다. 방랑의 날들이 쌓이고, 봄이와 관계가 깊어질 즘에야 깨달았다. '이건 평등하지 않다! 내가 봄이에게 저지른 짓은 종 차별이었다.!'라고.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고, 미안하고 미안했다. 인간 방랑 단원들은 결국 합의를 통해 당연했던 규칙을 재정비했다. '봄이 갈 수 없는 곳엔 우리도 가지 않는다. 봄을 차별하는 것에 동조하지 않는다', 라고.
언제나 ‘인간이라면?’의 질문이 적합하진 않았다. 오히려 ‘개님이라면?’하는 질문도 필요했다. 인간과 개님은 같지만 다르다. 다르지만 같고. 이건 무슨 ‘따로 또 같이’와 같이 아리송하지만... 예를 들자면 봄이는 ‘내 땅’에 대한 개념이 인간과 다르다. 인간에게 ‘내 땅’은 문서로 계약된 불멸에 가까운 재산이다. 우리에게 공간을 내어주신 소위 ‘집주인’ 분이 우리가 잘 쉬는지 보러 오시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봄이는 우렁차게 짖는다. 봄이는 그가 방랑 단원 5명의 얼굴이 아니기 때문에 내쫓고 싶은 것이다. ‘집주인’ 분들은 대개 불쾌해하신다. 봄이 너무 시끄럽다며 우릴 도로 내보내는 분들도 있다.
봄이에게 ‘내 땅’은 문서로 계약되지 않는다. 영원불멸도 아니다. 봄이에게 ‘내 땅’은 ‘지금, 여기’에 가깝다. 아주 잠시라도 자신과 동료가 쉬고 있다면, 그곳은 봄이 지켜야 할 영역이다. 외부인이 오면 자신과 동료를 보호해야 한다. 봄이는 예절교육을 못 받았거나, 어디가 고장 나서 그렇게 목청이 터지라 짖는 것이 아니다. 봄의 규칙대로라면 봄이는 일을 잘 수행할 뿐이다. 인간과 개의 규칙. 어느 쪽을 택하냐는 나중이더라도, 개의 규칙이 잘못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과 같은 규칙을 정한 야생동물님은 어디에도 없다. 인간이 돌연변인 셈이다. 산속 어딜 가나 봄의 규칙을 따라줄 것이다. 진짜 황당한 쪽은 봄이다.
같지만 다르다. 봄의 갈색 눈동자를 보면 알다가도 모르겠다. 도무지 포개어지지 않는 틈이 나와는 있다. 그 한없는 신비를, 그 무구한 영역을 들여다보면 문득 감사함을 사무치게 느낀다. '내 비인간 친구. 그래, 너는 그 몸으로 태어났구나'하고. 봄이와의 방랑은 헤아릴 수 없는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독수리님의 눈’을 찾기 위해 그 문장이 반들반들 해지도록 만지작댈 적에, 지리산님이 나를 갸륵히 여기셨다고 생각한다. 인간만의 눈으로는 ‘독수리님의 눈’을 찾기가 어려울 테니, 부족한 나에게 스승님을 보내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봄이에게 부단히 배웠다. 봄의 강인함에 경외하고, 나의 비겁함에 부끄러워하고, 봄의 인내심에 전율하고, 좁고 낡은 인간 중심의 시선을 더디게나마 깨부수는 자신에게 믿음을 보내면서.
마침내. 개님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을 찾았다. 지리산 품에서 얻은 배움을 다른 인간들에게 전달하는 일. 사 개월의 방랑을 마치고, 인간 방랑 단원들이 한 일은 공유회였다. 형형한 눈빛을 가진 여러 사람을 만났다. 지리산이 보여준 배움이 그들의 가슴 속에도 잔잔한 파동을 만들었음을 느낀다. '그래, 나는 이 몸으로 태어났구나' 하고 생각한다. 온 마음을 다해 지리산님의 메신저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독수리의 눈'을 보내주신 지리산님께, 존경의 입맞춤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