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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칩코 Oct 09. 2022

하루낮 하루밤

<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비전 퀘스트를 했다. 듣기도 처음이고, 해보기도 처음이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성인식이라고 했다. 깊은 숲 고요한 곳에 자리 잡고 한 걸음 보폭만 한 작은 원을 그린다. 그 원 안에서 먹지도 자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기다리면, 침묵 속에서 신의 계시가 주어진다고 한다. 신의 계시를 받고 부족의 품으로 돌아오면 어려운 영적인 시험을 통과했다고 여겨졌다. 인디언들에게 신이란 자연의 법칙이기도, 자기 내면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인디언들은 며칠씩 굶으며 했다지만, 난 그 정도는 아니었고 하루낮과 하루밤 동안 해볼 기회가 생겼다. 한 명이 진행해주고, 열댓 명 친구들이 참여하는 캠프 형식이었다.


큰 각오를 하진 않았다. 난 인디언 덕후라서 '인디언 성인식이라더라'는 말만 듣고 덥석 신청했을 뿐이었다. 비전 퀘스트 하루 전날 캠프 참여자들은 모였다. 숲을 미리 둘러보며 자신이 다음 날 내내 있을 아늑한 공간을 찾아다닌다. 그날 저녁 티피 안에 모여 다음 날을 위한 성스러운 의례를 마친 후 각자 텐트 안에서 잠을 잤다. 도착하기까지만 해도 난 비전 퀘스트 당일도 텐트에서 자는 줄 알았다. 물론 텐트에서 자도 누가 말리진 않았지만, 인디언들은 옷조차 걸치지 않기도 했다는 설명을 듣고 어쩐지 텐트는 두고 가야 할 것 같았다. 밤에 잠을 자는 것도 괜찮은 줄 알았는데 밤을 새운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막상 의례를 마치고 비전 퀘스트에 대해 자세히 들으니 겁이 불쑥 났다.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늦은 밤까지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그날 밤은 하필 비가 왔다. '내일 땅도 다 젖어있고 가을비라 훨씬 추워져 있겠지...'하는 걱정이 들었다. 눈만 동그랗게 뜨고 허공을 보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찾아왔다. 내가 이토록 인디언 덕후가 될 정도면, 아마 내 전생에 인디언 한 명쯤은 계시지 않을까? 여러 명이면 더 좋지만 적어도 한 분은 있을 것 같았다. 난 그 한 분에게 기도했다. 당신이 전생에 가졌던 용기와 지혜를 조금만 나누어 달라고. 그리곤 빗소리를 들으며 축축한 잠자리에 들었다.


비전 퀘스트 당일, 새벽이 밝으면 아침 6시에 눈을 뜬다. 당일부터는 서로 침묵을 유지한 채 알아서 자신이 전날 봐둔 공간으로 향한다. 참여자끼리는 가능하면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멀찍이 자리를 선정한다. 내가 봐둔 자리 근처에 다른 참여자가 있다면 안 보이는 곳까지 멀리 이동했다. 나는 전날 자리를 확실히 정하지 못했던 터라 한참을 어슬렁거리며 고민했다. 그러다 냅다 직관적으로 낮은 관목 숲 아래에 자리 잡았다. 당일에도 내내 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초겨울이 성큼 다가온 날씨였다. 다른 참여자들은 텐트나 타프, 돗자리라도 챙겼던데... 나는 달랑 엉덩이 방석 하나뿐이었다. 바닥이 젖어있으니 방석이 그래도 도움이 되었다. 다행히 관목이 꽤 우거져 비가 거의 새지 않았고 찬바람도 막아주었다.


방랑단 때 노숙은 몇 번 했어도... 그땐 마을 정자에서였다. 이렇게 야숲에서 지붕도 없이 덩그러니 노숙하기는 처음이었다. 아침이라 밝아서 그런지, 전날 밤의 두렵던 마음은 조금 진정돼 있었다. 한 번 더 전생의 인디언 아무개님을 향해 기도를 짧게 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곤 화들짝 놀라서 눈을 떴다. 소리를 지를 뻔했다. 누군가 내 귀에 아주 가까이 대고 말을 하고 간 것이다. 참여자인 다른 친구가 장난을 친 줄 알고 옆을 둘러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소름이 돋았다. 귀에 스쳐 간 누군가의 입김이 아직 선명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했다. 잠시, 침착하자. 뭐라고 했더라? 한국말이 아니었다. '파우와우'. 라고 한 것 같았다.


내 생애 가장 긴 하루를 보냈다. 시간이 지독히도 느리게 흘렀다. '파우와우' 목소리를 들은 후 무서워서 장소를 옮길까 진지하게 고민했으나, 비가 오고 번거로워서 그만두었다. 그 이후 또 날 놀랠만한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명상하려는데 자꾸 졸리고, 지겹고, 배가 고팠다. 당장 뛰쳐나가서 뜨끈한 국밥을 먹고 싶었다. 다리를 뻗고 눕고도 싶고, 어딘가 우다다다 달리기라도 하고 싶었다. 누가 감시하진 않았지만, 스스로 약속을 지키고 싶어질 뿐이었다. 나는 원 안에서 일어나지도 다리를 뻗지도 않고 버텼다. 날이 흐리니 태양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해라도 떠 있으면 몇 시쯤일지 짐작이라도 할 텐데. 아직 정오도 안 지났으려나, 설마...! 해가 이제야 지는군. 6시 무렵인가 보다. 그러면 고작 절반 해낸 거잖아? 다음 날 새벽 6시까지 앉아있어야 하니 12시간이나 더 남았어...' 혼자 이런저런 계산을 하다가도, 다시 명상 상태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현재에 머물면 시간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밤에는 결국 잠을 자긴 했다. 물론 바짝 웅크려서 몸을 콩 벌레처럼 말고 잤다. 깊이 잠들지는 않고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콩 벌레처럼 잠을 자는 자세가 너무 불편해서였다. 또 내가 너무 조그마해서 날 못 보고 고라니나 멧돼지가 날 밟고 가면 어떡하나 싶었다. 밤에는 비가 그쳤다. 바람이 불 적마다 낙엽들이 재잘거린 것 말고는 아무 소란이 없는 고요한 밤이었다. 어둠 속에서 꿩이 내 옆을 느긋하게 걸어갔다. 꿩이라면 인간의 한숨 소리만 들어도 요란하게 도망치기 마련인데. 다람쥐도 아주 가까이 걸어와 도토리를 먹고 갔다. 내가 꼭 바위가 된 기분이었다. 배가 적당히 고프고 몸은 적당히 지쳐서 오히려 마음이 차분했다. 미소가 조용히 지어졌다. 낮보다 더 긴 밤이 지나고, 다음 날 기적처럼 해가 밝았다.


아침엔 참여자들과 다시 티피에 모였다. 따뜻한 모닥불과 수프가 차려져 있었다. 이렇게 행복할 줄이야. 뜨끈한 수프를 담은 볼로 두 손을 녹이며, 우린 한 명씩 돌아가면서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를 무사히 보낸 서로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말하는 사람은 왕좌 같은 의자(그래봤자 나무토막이지만)에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고민이 되었다. '파우와우'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이미 하루가 지나고 보니 꼭 꿈처럼 느껴졌다. 내가 바람 소리를 잘못 들은 것도 같고, 너무 겁이 나 환청을 들었나 싶었다.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었다.


결국 이야기했다. 내 전생의 인디언에게 기도했는데, 나에게 뭐라고 응답하고 간 것 같다고 말이다. 친구들은 나보다 더 흥분해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파우와우'를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인디언들의 축제 이름이었다. 구글엔 화려한 깃털 등의 장신구를 매단 인디언들이 축제를 즐기는 사진들이 나왔다. 친구들은 내년엔 비전 퀘스트 말고 파우와우를 하자면서 잔뜩 신나 했다. 얼떨떨했지만 나도 즐거웠다. 살면서 가위 한 번 안 눌려본 내가 무슨 신비체험이라도 해버린 걸까. 진행하는 친구는 이런 말을 했다. 비전 퀘스트에서 저마다 받은 신의 계시를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일 년은 더 걸릴 수도 있다고 했다.


지금 딱 일 년이 지난 시점이다. 뜬금없는 '파우와우'란 단어가 당최 무슨 의미였을지 열심히 해독
해보았지만 잘 모르겠다. 내가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려는 지도 모른다. 다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수행에 지나치게 진지했다는 생각. 출가 고민도 그렇고, 명상센터에서의 기병도 그렇고. 인디언 말씀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삶은 하나의 꿈이며 신비다. 가볍게 여행하라.'

가볍게. 재밌게. 괜한 겁을 먹어서 전생의 인디언까지 무덤에서 호출하지 말고, 그냥 꿈꾸듯이. 그렇지만 물러서지 말고. 좀 축제처럼 즐기면서 하라는 말씀이었나, 하고 해석해버렸다. 요즘도 계속 삶에서 약간은 힘을 빼려고 노력한다. 치열하게 하루를 살되, 지나가는 꿈이라고 여기려고 한다. 치열한 꿈이라니. 모순되게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똥이 밥이 되고, 여름이 겨울이 되고, 절실하되 집착하지 말고, 단순하되 깊이가 있고. 지구에선 모든 게 뒤섞인다. 삶은 역시 '적당히'인가 보다.


ⓒbostonpubliclibrary


책 속에서 인디언들의 흑백사진을 본다. 그들이 꼭 지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처럼 눈동자를 뚫어지게 한참을 보기도 한다. 어린이에겐 위엄이, 노인에겐 천진함이 뒤섞인 그들의 짙은 눈동자. '음, 이중 누구신지는 몰라도... 그래서 저 성인식 의례 통과한 겁니까?'라고 묻는다. 또 '파우와우' 같은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다. 답은 내 눈동자에서 찾아야 한다는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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