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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칩코 Oct 09. 2022

[에필로그] 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자,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아마 단순히 '빽없는 청년 귀촌일지'인 줄 알고 들어왔다가 '인디언 덕후 영성일지'라서 당황한 분들도 계실 것이다. 공갈은 아니고, 정말 귀촌하고 내가 그렇게 바뀐 걸 어쩌겠나.


누구나 한 번쯤 시골의 전경을 보면 '아름답다!'라고 생각할 테다. 빌딩 숲 없이 탁 트인 하늘, 미세먼지 걷힌 맑은 구름, 향기로운 풀 냄새를 실은 바람,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산, 흐르는 강물에 비친 윤슬... 이 모든 것이 지구의 표현이다. '아름다움'은 특별하다. 이건 동의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아이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아이를 보고 찬탄할 것이다. ‘네가 눈만 성형한다면 정말 아름다울 텐데’라고 느끼지 않는다. 지금 그대로 더할 나위 없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대상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된다. '아름다움'이란 어느 한 군데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다.


인디언들은 야생을 자유라고 했다. 나는 이 문장을 읽자마자 단숨에 이해했다. 이상한 일이다. ‘야생’이라고 생각하는 곳에 날 던져둔다면 난 아마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다가 구조헬기만 기다릴 것 같은데, 야생이 자유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니. 나는 야생을 뭐라고 생각했던 걸까? 곰곰이 돌이켜보았다. 야생이란 지구의 어떤 표현을 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상태이다. 길을 헤매다 마주친 작은 숲에서 두려움보다 아름다움을 먼저 발견하는 일. 나에게 딱 맞는 나무뿌리 동굴을 찾아서 몸을 뉘는 일. 그 곁에 찾아오는 방울새나 야생 쥐를 상냥히 마주하는 일.


그 숲의 나무를 쳐내서 집을 짓고 도로를 내는 것을 야생이라 여기는 사람은 없을 테다. 이는 지구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 때 받아들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지구의 볼을 잡고 억지로 웃는 표정을 만드는 일이다. 아마 대부분 사람은 지구의 표현이 불편해서 도시를 만들었을 것이다. 벌레가 싫고, 춥고 더운 게 싫으니까. 만약 내가 지구의 모든 표현을 그대로 수용할 수 있다면 나는 아주 편안한 상태일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동의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그걸 난 자유롭다고 부른다. 마음속에 어떤 티끌만 한 거리낌도 없는 상태이므로. 그래서 야생은 자유다.


질경이는 밟혀도 부러지지 않는다. 줄기가 없어서다. 발길이 많은 곳엔, 보통 풀들은 죽을까 봐 가까이 가지도 못하는데 질경이는 기세가 등등하게 번식한다. 납작한 질경이만의 특별한 생존 비법이다. 거꾸로 질경이가 많은 곳은 발길이 많다는 의미다.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질경이를 따라가면 인가에 이를 수 있다. 귀촌할 것 없이 죄다 시골 사람인 옛날 선조들은 질경이가 이리도 친절한 풀인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질경이의 심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우리가 귀를 기울이면 언제든 길을 알려줄 의사가 있다.


ⓒ아영


이 글은 내 안의 야생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지구의 표현에 하나하나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가는 여정이다. 귀촌하고 난 미처 몰랐던 지구의 수많은 표현을 배웠다. 어떤 배움엔 뜨겁게 감격했지만, 어떤 배움은 따끔해서 또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혹독한 커리큘럼 속에서도 언제나 지구는 내 발밑에 질경이를 심어두었다. 길을 잃지 않고 잘 따라와서 배움을 얻도록. 당신도 발밑을 봐보시라. 무엇에 발 딛고 있는지 알면, 어디로 가야 하는 지도 보인다. 혹시 아스팔트 때문에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면, 아스팔트를 지금 당장 떠나보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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