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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 Project Oct 30. 2019

[서울의 장인들-1] 다회장과 매듭장

광희문 일대에서 끈을 짜고 매듭을 짓던 서울의 장인들


장인의 도시, 서울


중용엔 군자가 천하를 다스리기 위한 핵심 9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凡爲天下國家有九經,曰:

脩身也、尊賢也、親親也、敬大臣也、體群臣也、子庶民也、來百工也、柔遠人也、懷諸侯也。

범위천하국가유구경 왈

수신야 존현야 친친야 경대신야 체군신야 자서민야 래백공야 유원인야 회제후야


이 중 일곱 번째 기준인 “來百工”은 바로 뛰어난 장인을 데려온다는 것을 말합니다.


조선을 건국할 당시,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도읍을 만들기 위해 전국 장인들을 모아 수도를 정비했습니다. 다양한 토목공사를 진행하고, 국가의 격을 드러내기 위한 각종 물건을 제작했습니다. 공사가 끝난 후, 그중 가장 솜씨가 뛰어난 목수 100명을 국가 토목 관아인 선공감(繕工監)에 포함시켰습니다. 그 외 장인들 또한 왕실 공방과 양반 계층 수요의 제품을 만드는 경공장(京工匠)에 포함되었습니다.


<한양도漢陽圖>,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관영 수공업자에 대한 대우가 좋았던 조선 건국 초기, 즉 조선 전기. 수공업 장인들의 주요 활동지는 다름 아닌 왕실과 관아가 집중되어 있는 종로 일대였습니다. 높은 완성도를 요하는 주문일 수록 공정이 세분화되어 있었습니다. 다양한 공정을 다루는 각기 다른 분야의 장인들은 주로 종로 일대에 자리 잡아 왕실에 필요한 물건을 제작, 납품하였습니다.


[서울의 장인들] 1편에서 소개하는 다회장과 매듭장은 의복과 행사에 필요한 끈을 제작하고, 매듭을 짓는 장인들입니다. 이들은 현 동대문 근방인 광희동에서 집단 거주, 활동했습니다.



다회장과 매듭장


다회(多繪)는 짜여 만든 끈을 칭하고, 끈을 짜는 일을 “다회 친다”라고 표현합니다. 다회는 크게 납작한 모양의 광다회와 동그란 원다회가 있는데, 광다회의 경우 옷을 착용할 때 허리띠로 쓰였으며, 원다회는 노리개나 유소 등 매듭을 지어 제작하는 장신구에 쓰였습니다.  


다회틀로 "다회 치는" 과정. 출처: 취 프로젝트


다회장은 이를 제작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다회장이 제작하는 각종 끈은 조선시대 행사나 격조가 있는 차림에 다양하게 요구되었기에, 총 세 기관에 다회장이 속해있었습니다. 경국대전엔 다회장이 병조에 2명, 상의원에 4명, 전설사에 6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병조는 조선시대 군사업무를 총괄한 기관, 전설사는 궁중 의례에 사용되는 천막, 장막을 관리하는 기관, 상의원은 임금의 의복을 진상하고, 대궐 안의 재물과 보물의 간수를 맡아보던 기관입니다.


병조에서 다회장의 제작품으로 무신들의 옷차림에 주로 사용된 허리띠가 있습니다. 다회 중 납작한 모양의 광다회는 의례용 철릭에 주로 둘렀습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16호윤용구 유물 (尹用求 遺物). 철릭에 둘린 광다회가 허리띠 역할을 한다.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다회장이란 장인은 서울에서만 존재했습니다. 즉. 서울의 관영 장인을 칭하는 경공장 목록에만 다회장을 확인할 수 있으며, 지방 관영 장안 목록에는 다회장이 없습니다. 지방에선 끈목을 제작하지 않았단 말이 아닌, 수요가 서울만큼 많지 않아 분업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매듭장은 경국대전에서 “매즙장(每緝匠)”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매듭장은 실이나 노끈으로 노리개와 유소 등 장식을 제작하는 장인입니다. 매듭장은 병조에 2명, 상의원에 4명 속해 있었습니다.


김희진 매듭장의 매듭 짓는 모습.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다회와 매듭의 동네, 광희동


다회와 매듭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구되는 완성품에 따라 다회장이 적절한 끈을 제작하는 것이 적절한 매듭 결과물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죠. 혹은, 다회장이 따로 있지 않는 지방의 경우 매듭을 하는 장인이 끈 또한 짰기 때문에 (다회를 쳤기 때문에) 두 종류의 장인은 떼려야 뗼 수 없는 협업을 하고 있었겠습니다.


조선 후기, 관영 수공업이 쇠퇴하고 개인이 운영하는 시전이 형성되며 장인들은 왕실과 양반 계층은 물론, 일반인을 대상으로도 상업 활동을 했습니다.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장인들이 집단을 형성해 판매 상권을 만들었죠. 그중 조선 전기 경국대전에 기록되어 있었던 다회장과 매듭장은 광희문 일대, 현 서울특별시 중구 광희동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광희문의 또 다른 이름인 시구문은 “시체가 드나드는 문”이란 뜻입니다. 시체가 나갈 시 그 상여를 매듭이나 상여로 장식하였기 때문에 매듭장들이 시구문에 모여 살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현 광희문의 모습. 출처: 위키피디아


비록 1950년대까지 광희문 근방은 ‘매듭장이’들이 가득했다고 하지만 전통 수공업계 시장의 침체, 많은 매듭 과정의 사장으로 현재 광희동에서 과거 매듭장들의 흔적은 찾기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듭을 이어나가고 있는 다양한 사례에서 광희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전통 매듭 상점, 뉴신사는 1970년에 만들어진 매듭 끈 제작 및 매듭 판매 업체입니다. 현재 뉴신사는 신설동으로 이전했지만, 옛 주소는 광희동 근방인 종로 5가에 있었습니다.


나아가, 전 중요무형문화재 22호 기능 보유자, 매듭장 최은순 장인은 매듭을 광희문 근방에 사는 집으로 시집 가서 배우셨다고 합니다. 당시 최은순 장인의 배우자, 매듭장 정연수 씨는 대를 이어 광희문 근방에서 매듭을 짓던 장인이었습니다. 최은순 장인은 남편을 도우며 매듭을 접했습니다. 과거 힌국문화재재단 인터뷰에서 그녀는 커다란 실뭉치를 들고 다회를 치는 일이 힘들었다며 회상을 합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2호 매듭장 故 최은순. 출처: 문화유산채널


옛 서울 시민들의 일상, 공예


다회를 치는 일과 매듭을 짓는 일. 예부터 내려온 한국의 전통 공예입니다. 장인의 도시, 서울에서 그들은 왕실을 위한 매듭을 짓기도, 이를 향유한 서민들의 일상에서 끈과 실, 매듭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매듭은 광희동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 기술의 사장으로 매듭 기술을 보유하는 개인은 각자의 생계를 영위하기 수월한 곳으로 이전해 거주하고 있습니다. 혹은, 매체의 발달로 매듭을 배울 수 있는 다양한 통로를 통해 집에서 매듭을 익히고 배우는 일반인들이 있기도 합니다.


광희동을 중심으로 서울 시민들이 제작, 소비하고 즐겼던 매듭. 마땅히 즐길 수 있는 우리의 전통문화라 생각합니다.



출처:

『15권 조선시대편 : 조선시대 서울 경제의 성장』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고동환, 백승철, 이종봉, 이욱, 이정수, 김대길, 손승철

"한국매듭의 역사"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89657&cid=40942&categoryId=32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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