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 번째 일기장을 찾아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일기를 썼다. 내가 가지고 있는 최초의 일기장은 1985년 2월의 것으로 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이 시작이다. 그 이전의 일기는 스스로 관리하기엔 너무 어려서였는지, 다 소실되었다. 그로부터 현재 2025년, 40년간 나의 일기 쓰기는 계속되었다. 하루에 여러 번 쓴 날이 있는가 하면 겨우 이십여 일의 기록만 남긴 해도 있었다.
1997년부터는 워드로 컴퓨터에 써서 저장했고, 실물 일기장은 책장 깊숙이 보관되었다. 파일로 쓴 일기는 컴퓨터를 바꾸거나 파일 정리를 하다가 실수로 삭제되는 경험도 꽤 했다. 그때마다 내 인생이 삭제되는 것 같은 고통도 느꼈다.
오늘 나는 내 책장 맨 밑, 왼쪽 여닫이 문을 연다. 그곳에 내 어린 시절의 활자 기록물이 겹겹이 쌓여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누가 칭찬하지도 않았지만 꾸준히 써왔던 내 인생의 기록이다. 그 낡은 공책들은 일종의 개인적 '삼국사기'이요 '용비어천가'이다. 그만큼 내게는 유구하고 숭고하지만 때론 지독하기 그지없고 한없이 부끄러운 '나'의 기록이다.
첫 번째 일기장을 찾아보려 가장 낡고 촌스러운 노트 몇 권을 열어본다. 다행히 'my 첫 번째 일기장, 두 번째 일기장...'이런 식으로 제법 인덱스가 되어있다. 열어보기 두렵다. 민망하다. 어떤 내가 나타날 것이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40년 전의 어린 나는 이미 '내가 아닐 것'이 분명하다. 낯선 나를 만난다는 것은 익숙한 나를 확인하는 일보다 어려운 법이다. 불안감 때문인지 몸이 베베 꼬이기 시작한다.
애써 무심한 척, 초기 몇 권을 뒤적이다가 발견한다.
'이게 뭘까'... 한참을 들여다보고서야 알아낸다. 글을 쓴 뒤 그 위에 '사랑'이라는 글자를 덮어씀으로써 아무나 글을 판독하지 못하게끔 만들어둔 것이다.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였나 보다. 애써 해독해 본다. '난 지금 뭘 위해 살까, 난 이제 어린애가 아냐, 불안해, 나 혼자 있고 싶어' 같은 문장이 있고 '엄마, 아빠'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적혀있다.
그러다 불현듯 그날이 기억났다. 어떤 일이었는지도... 눈물이 핑 돌았다. 어린 나의 고통이 현재의 내게 고스란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그 글들을 덮어버린 '사랑'이라는 글자는 오늘의 나를 너무 부끄럽게 했다. 작은 가슴으로 할 수 있는 사랑이 얼마나 된다고. 어떤 사랑으로 무엇을 덮으려고 했을까, 덮을 수나 있었을까 많이 안쓰러웠다. 1987년 8월, 열네 살의 나는 어려도 결코 작지 않은 하나의 사람이었구나, 어쩌면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었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 이런 여정이 바로 <나 읽기>의 과정이다. 나는 앞으로 '내 젊은 날의 일기'를 짚어가며 '나 읽기'의 길을 걸어보려 한다. 멋진 길도, 다채로운 길도 아니다. 아주 평범한 한 사람의 길이다. 결코 먼 길도 아니어서(결국 나에 관한 얘기이므로), '순례' 같은 근사한 단어도 붙일 수 없다. 그저 어느 동네에나 있는 둘레길 한 바퀴 걷는 정도의 이야기이다.
평소 나는 '혼자 걷기'를 좋아하는데 이번 여정은 나라는 동행자와 함께 한다. 때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겠지만 소리는 없고, 많이 고민하겠지만 완전히 미궁은 아닐, 잊히긴 했어도 떠올릴 이미지 하나쯤은 남아있을 과거의 나를 친구 삼는 일이다.
이것을 읽는 여러분께 나의 첫 일기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표지에 제목도 적혀있다. '꽃마음 소녀', 너무 촌스럽긴 하다. 첫 페이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my 첫 번째 일기장, 이름 : 마음>이라고.
시작은 쉽지 않다. 그래서 걱정도 된다. 그래도 이 여정을 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길의 끝엔 꼭 한 가지를 배우고 싶다. 그것은 바로 내일의 나에 대한 '친절함'이다. 내일의 나를 조우할 때 편안히 안아줄 수 있는 너른 내가 되길, 오늘의 실패도 성과도 잘 토스하는 담백한 내가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