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읽기, 내 젊은 날의 일기 #001
난 어릴 때 전학을 자주 다녔다. 부모님의 일이 변동이 잦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만 총 4번의 전학을 갔는데 어린아이에게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에게 학교는, 친구는 '세상'이다. 이 시기에 전학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의 이동만큼 엄청난 것이다.
'난 오늘 참 슬프다'로 시작되는 1985년 2월 12일 일기를 살펴보자.
난 오늘 참 슬프다. 오늘 아침엔 너무너무 기뻤다. 인천(그 이전 거주지)에 가기 때문이다. 나는 인천에 도착하여 옛날에 살던 집에 갔다. 그런데 왠지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옛날에 그냥 턱턱 들어가지던 집이 어쩐지 달라진 기분이 들었다.
-중략-
왜 그럴까, 왜 난 못 들어갈까? 슬프다.
친구집에 갔다, 갔지만 집에 어른들이 계셔서 우리는 나와서 걸어 다녔다. 부자네 집도 가보고, 정주, 지선의 집도 가보았지만 역시 노우(NO)였다. 난 할 수 없이 나 혼자 학교에 가서 생각했다. 내가 이곳 아이들에겐 필요 없는 아이란 걸.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난 이제 다시는 이사 같은 건 안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예전엔 인천 아이들이 날 좋아했다. 지금은 모르겠다. 난 이사란건 무서운 거라고 생각했다. 날 좋아했던 아이들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난 그때 아이들이 그렇지 않길 빌었다. 그러면서 슬픈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우리 가족은 인천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이사 후 한 학기를 보냈고 때는 방학이었다.
전학생의 첫 학기가 얼마나 혹독한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똘똘 뭉쳐 나를 밀어낸다. 한 반에 60명이 넘던 시절이니 총 120개의 눈이 보내는 따가운 시선과 곁눈질에 자꾸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나 둘 나에게 친화적인 아이들이 생겨나긴 하지만 그 무리의 일부가 되는 건 매우 조심스럽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봄날의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한 학기를 보낸 후였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힘들게 한 학기를 보내고 겨우 부모님을 졸라 옛 동네 방문을 허락받았다. 인천이라는 먼 동네에,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그것도 혼자서 갔던 바로 그런 날이었나 보다.
그렇게 살던 동네에 들어서고, 살던 집에 갔지만 이미 그곳은 내가 사는 곳이 아니니 문턱을 넘기가 어려웠겠지. 친구 집을 하나하나 순방했지만 그들에게는 나름의 스케줄이 있었을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도 6개월은 꽤 긴 시간이었을 테고 나를 제외하고 그들이 보냈던 그 시간은 의외로 단단해서 내가 들어갈 자리란 없었을 것이다. 나는 '무리'에서 나왔던 것이다. 새로운 '무리'로 들어가야만 했던 내가 외롭게 고군분투하는 동안 이전의 무리는 이미 나를 제외시켰다.
어린 나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이전 학교에서 나는 소위 인싸였다. 그 학교를 떠날 때 많은 아이들이 울고불고 나를 배웅했으며 많은 이별 선물을 받았고, 전학 후 몇 개월 정도는 편지도 주고받았다. 놀러 가면 대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라고 하지 않던가.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은 나를 잊었다. 그들은 무리였기 때문에 혼자 빠져나간 나를 쉽게 잊었다(당연한 일이다, 안다).
아직 새로운 무리에 안착하지 못한 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내가 그 무리에 정착하면 곧 나도 그들을 잊게 된다는 걸, 아직 예측하지 못한다. 5학년은 그래서 '슬픔'을 논한다.
사람을 잃는 기분은 그렇다, <슬픔>이다. 지금도 간혹 사람을 잃는다. 이유는 꽤 다양하다. 성향이 안 맞아 거리를 두는 경우도 있고 시답지 않은 사건 때문에 관계를 끊는 일도 생긴다. 때론 직장의 변동 등 타의에 의해서도 우리는 서로를 <잊고 잃는다>.
'잊는'것은 자의 같고 '잃는' 것은 타의 같지만 결국 <잊는 것은 잃는 것>이고 <잃는 것은 잊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일정분량의 '슬픔'이 있다. 잊은 자나 잊힌 자나 상처는 있다.
열한 살의 내가 어떻게 저 시기를 이겨냈는가. 결국 나도 새로운 무리의 일부가 되는 데 성공하고 친구를 얻으면서 그 슬픔을 이겨냈다. 그리고 그들을 자연스럽 잊어주었다.
사람을 잃는 슬픔은 사람을 얻으므로 치유된다는 뭐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도리어 이렇게 본다. 내가 잊혀지는 것에 대해 연연하지 않는 것이 내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이라고. 나를 잊은 그들을 탓할 필요가 없다고.
5학년의 나에게 돌아갈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해줄 것 같다. '괜찮아, 자연스러운 일이야, 너무 슬퍼하지 마'
나도 많은 이들을 잊고, 잃고 살아간다. 때로는 선택하고 때로는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다. 신기하게도 어른의 관계가 되려 헐겁고 가벼운 지점이 있다.
그래서 자주 슬프다. 그러나 그 슬픔을 닦아내는 데에 꼭 새로운 관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누군가에게 잊혀진 나 자신을 도닥이는 내 마음의 건강함이라는 손수건, 그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