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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꿈꾸지 않는가

나 읽기, 젊은 날의 내 일기 #002

'꿈'이란 단어가 내 인생에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않은 건 언제부터였을까.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젠 '꿈' 하면 간지러운 마음부터 드니 이 역시 나이 탓일까. 나는 50대다. 내게도 여전히 소소한 바람이 있고 크고 작은 목표도 있다. 그러나 그런 기대감은 '꿈'이라는 단어와는 확연히 때깔이 다르게 느껴진다.




15, 02, 2005(이 때는 독일에서 유학하던 시절이라 일, 월, 년의 독일식 날짜 기입 순서를 쓰고 있다)


새해를 맞는가 싶더니 어느새 2월의 한가운데... 시간, 세월의 속력이 요즘은 가히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그에 발맞추어 살기를 포기한 지 오래지만 그래도 그저 시간을 버리고 죽여가며 무의미하게 살고 싶지는 않은데 생각만큼 잘 살아지지를 않는다. 요즘은 일기를 통 쓰지 않고 있다. 평생을 해온 어떤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무언가 자신에게 커다란 내면의 변화가 생겼다는 뜻 아닐까. 지금 내가 변화를 논한다면 그것은 그렇게 바람직한 변화는 아닐 터, 그것도 일기를 쓰고 안 쓰고의 여부에 있다면 그것은 최소한 무뎌진 또는 게으른 삶의 증거일 것이다. 그렇다, 나는 게을러졌고, 무뎌졌다. 무감각 또는 무의미한 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아무런 이의도 달 수 없는 것이 지금의 나이다. 하루하루 죽어가는 ‘나’는 어떤 팽팽한 삶에의 긴장을 동경하지만 일상은 나를 물고 늘어진다. 버틸 힘이 없는 나는 꿈이 없이 살기에 익숙해진다. 그래서 요즘 가슴 한편, 답답하고 슬프다.


아이는 잘 자라고 있다. 잘 먹지 않지만 말할 수 없이 쌩쌩하게 장난꾸러기와 떼보로 자라고 있다. 나는 늙어가고 아기는 성장한다. 성장과 노화의 갈림길이 굳이 나이로, 육체적 나이로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은 여전하지만 확실히 나는 ‘노화’의 길로 들어섰다.


나의 상상력은, 나의 의지는, 나의 생에 대한 기대감은 어느새 늙고 지쳐가고 있다. 한 가닥 희망이 있다면 아직은 타파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더 늦기 전에 일어선다면 아직 내게는 희망이 있다. 사랑하는가, 삶을? 그렇다! 그렇다면 다시 시작하자.




결혼 후 출산을 하고 아이가 17개월일 때의 일기다. 그때 나는 독일에 유학 중이었는데 나름 치열했던 나의 학업은 육아 때문에 당연스레 스톱되었다. 길을 걷다 절벽 끝에 다다른 것처럼 내 발은 묶였다. 누군가에 의해 내 길이 이렇게 막힌 적이 있었나, 없었다.


아이는 내가 없인 먹지도, 입지도, 잠들지도 못하는, 세상에 떨어진 아주 작은 생명체였다. 엄마인 죄(?)로 나는 그 작은 생명체의 가장 안전한 보호자요 충직한 헬퍼가 되어야만 했다. 나는 종일 아이의 필요를 메꾸기 위해 종종거렸다. 아이가 먹기 전에 먼저 먹은 적도, 아이가 자기 전에 잠든 적도 없었다. 이것은 가히 '종'의 삶에 준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종으로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내가 내 아이의 종이 되었다. 내 하루는 지극히 단순해졌다. 먹이고 입히고 치우고 나면 하루가 내 인생에서 쑥쑥 빠져나갔다.


미리 밝히자면 육아가 힘들기만 했던 것은 분명 아니다. 나는 출산과 육아만큼 내 인생을 자라게 한 것이 없었노라고 말하곤 한다. 육아를 통해 나는 내 인생의 첫 헌신을 배웠다.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육아는 육체적으로 꽤 힘에 부쳤다. 두 사람분의 삶을 혼자 감당하는 일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육체적인 피로는 금방 적응이 되었다. 되려 나는 정서적인 어려움을 찐하게 느꼈다. 그때 나의 모든 신경은 오로지 아이에게 집중해 있었다. 때문에 나는 결코 '나일 수' 없었다. 나는 나에 대한 집중력을 많이 잃어버렸고 이전에 비해 창의적인 생각을 혹은 창작을 하지 못했다. 음악 작업은 물론 일기 한 줄 쓰기도 버거운 상태가 되었는데 그때의 나는 진정 내가 아니었다(위의 일기도 문맥이 상당히 엉성하다).


나는 깊은 사유를 하지 못했고 의지적으로 책을 읽지도 못했으므로 내 학업과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흐릿해져만 갔다. 그런 나를 나는 감히 '늙었다'라고 생각했다. 그때 내 나이 겨우 서른세 살이었다. '노화'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힌 말이다.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내 인생의 무력감을 표현할 다른 단어를 찾지 못했던 것 같다. '자기부정감'이라는 단어가 실재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 나 자신이 부정되는 과정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매우 괴로웠다.



그리고 꿈이 없이 살기에 익숙해진다,라고 쓴다.


꿈이란 무엇인가. 흔히 어릴 때 갖는 현실성 없는 장래희망 같은 것을 우리는 흔히 '꿈'이라고 부른다. 사전적 의미로 꿈은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을 말한다. 실현하고 싶은, 이라고 했으니 개인적인 '바람'과 맞닿아 있지만 이상이라고 했으니 이루기 쉽지는 않은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루기 어려운, 대단히 염원하는 일, 정도가 꿈이라는 것이다. '오늘 저녁 메뉴가 불고기였으면 좋겠다'라든지, '체크무늬 목도리를 갖고 싶어' 같은 것을 꿈이라 하지 않는다. '내일 시험을 잘 봤으면 좋겠어' 같은 바람도 '꿈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실현 가능성이 낮더라도 내가 진정 바라는 것, 지금 당장이 아닌 조금 더 먼 인생에서 날 향해 들려오는 희미한 멜로디 같은 것을 꿈이라고 부른다. 그것엔 아직 실체가 없다. 당연한 것이, 그것은 내면 깊숙이에서 일어난 하나의 파동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 구체화 되고 발전되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꿈이라 부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꿈이라는 단어는 그만큼 비현실에 가깝다.


그런데도 꿈이 중요한 것은 실현의 여부에 목메지 않은 자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꿈이란 당장 이루어지지 않아도 좋다. 내 삶에 큰 모토와 같이 나를 끌어주면서도 바로 지금 성취해야만 하는 부담으로 나를 짓누르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당면한 현재의 문제이기보다는 실수투성이인 삶 속에서 방향을 잡아주는 순백의 이정표 같은 것이다.


20 년 전의 나는 그렇게 방향성을 잃고 괴로워한다. 그러나 글의 말미에 보면 다시 희망을 이야기한다. 삶에 대한 사랑을 힘겹게 길어 올린다. 부럽다, 그런 '내'가 나는 진정 부럽다.


언제부턴가 내겐 좋아하는 것이 별로 없다. 갖고 싶은 것도 딱히 없다. 좀처럼 화도 잘 나지 않는다. 손꼽아 기다리던 것도 포기하기 일쑤이며,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슬그머니 놓아버린 손이 꽤 된다. 이룰 수 없는 것은 꿈조차 꾸지 않는다. 꿈이 없이 사는 것에 적응해 버린 나는 드디어 인생 적응에 성공한 것인가, 아니면 타성에 젖은 것인가. 이젠 정말로 '노화'되어 버린 것은 아닐는지.


2005년 나처럼, 다시 한번 희망을, 힘겹게 끌어올려본다. 50대의 나는 과연 어떤 꿈을 꿀 것인가. 두 눈을 조용히 감아본다. 나는 조용히 나를 바라본다. 오롯이 나를 느껴본다. 그리고는 조용히 읊조려 본다. 나는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고 노래하며, 살고 싶다고. 잔잔하게 가슴이 뛴다. 젊은 날의 그것처럼 '쿵쾅'거리지 않더래도 나는 지금 너무나 생생하고 따숩다.


이런 나라면 아직 나는 '노화'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다,라며 도리어 매우 기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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