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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에의 갈망

나 읽기, 내 젊은 날의 일기 #004

나는 지금 옥천의 한 강가에 홀로 앉아있다. 몇 년 전 트럭을 개조한 작은 세미캠핑카를 샀다. 그 후 거의 매주, 밖으로 나와 하루 혹은 이틀, 한뎃 잠을 잤다. 이 작은 차는 내게 또 하나의 집이 되어 나를 새로운 환경으로 데려다 주었다. 나는 자연 앞에서 잠들고, 눈뜨는 하루를 맞는 습관을 들였다.


캠핑을 시작하기 전엔 많이 망설였다. 과연 내가 아웃도어의 생활에 적응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시작하고 나서는 낯선 곳에 가서 잠드는 일이 어렵고 두려웠다. 그러나 차츰차츰 그에 익숙해졌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마무리하고 캠핑에 나서는 일은 일종의 일탈이기도, 반대로 아니기도 했다. 평상시 삶을 기준으로 볼 때는 분명 일탈이었다. 그러나 나는 캠핑에서도 집에서와 비슷하게 생활했으니 일탈이 아니기도 했다. 나는 밖에서 먹고, 마시고, 잠을 잤다. 글을 쓰고, 수업을 준비하고, 음악을 들었다. 캠핑은 분명 일종의 여행이다. 그러나 집에서 할법한 평범한 하루를 이어간다는 점에서는 여느 여행과 달랐다. 볼거리와 액티비티를 위해 돌아다니는, 숙소를 예약하고 그 중심으로 동선을 잡는 분주한 여행과 캠핑은 분명 차별점이 있다.


캠핑의 핵심은 가는 곳에 집을 짓는 것이다. 그리고 밥을 먹는다. 익숙한 집(텐트)에 익숙한 식기(코펠)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차 한 잔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내 원래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구경거리, 체험거리가 따로 없다는 점에서 단순한 여행이다. 나는 캠핑을 '세상에서 가장 심심한 여행’이라고 말하곤 한다. 캠핑은 그저 자연 속으로 ‘살러’가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이 남는다. 그러니 심심하다. 그 심심함이 캠핑의 매력이다.


또한 캠핑의 가장 좋은 점을 들라면 단연 ‘고립’이었다. 이 고립은 스스로 세상에서 자발적으로 떨어져 나와 얻어진 고립이다. 이것은 소극적이지만 내 성격에는 아주 잘 맞는 종류의 것이었다.





1998.09.09


‘고립’....

그 단어를 방송에서 듣는 순간 나는 갈증을 느꼈다. 고립, 완전한 단절에의 열망에 나는 남몰래 몸을 떨었다. 강이 되어버린 길들, 넘쳐나는 맨홀, 물에서 피어나는 무거운 습기, 그리고 지워져 버린 왕래의 흔적. 나는 그러한 것을 은밀히 꿈꿔 보았다.


아무데도 ‘안가는’이 아니라, ‘못가는’상황, 아무도 ‘못 오는’ 상황, 그러한 것 말이다. 꼼짝없이 집안에 표류되는 것, 모두로부터 합법적인 독립을 하는 것.




이렇게 격렬한 고립을 꿈꾸다니 그 때의 나는 얼마나 괴로웠던 것일까. 아마도 사람과 세상에의 소통이 어렵고 그 고통이 너무 컸나보다. 소통이란 그렇게 힘들다. 특히 방황하는 20 대에게는. 그러나 그 혼돈 속에서도 사람은 안다. 소통이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그걸 배우고 연습하며 어른이 된다. 스물여섯이었던 나는 확실히 성장기였다. 일종의 성장통에 몸부림치던 젊은 영혼이 읽힌다, 몇 줄의 일기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떤가. 나는 성장을 멈추었나? 아니다, 살아보니 성장은 끝이 없다. 사람은 완성이 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자라고 성장하는 과정에 있다. 혹자는 이것을 '성숙'이라고 부른다. 고로 나는 여전히 고립을 갈망한다. 다만 젊은 날 처럼 폭력적인 고립을 꿈꾸지는 않는다. 대신 자발적인 고립을 보드랍게 실천해나간다. 그렇다, 꿈꾸지 않고 실천해나간다. 혼자 있는 시간을 갖거나, 조용히 티 한 잔을 마시는 것, 그것으로 외적 갈등의 스위치를 단호하게 오프하는 것이다. 캠핑역시 그러한 자발적 고립의 한 종류로 내가 기꺼이 선택한 것이다.


고립은 선택이다. 자발적 고립은 다시 내 삶으로 돌아가 ‘다시 함께’ 살아갈 힘을 준다. 고립은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유 같은 향기로운 기름이다. 삐걱이는 내 삶을 윤택하게 해주고 맛깔나게 하는 고귀한 일탈행위이다.


앞서 말했듯, 지금 나는 홀로 강변에 있다. 자발적인, 선택적인 고립에 충실한 시간이다. 나는 그저 고요히 앉아있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거나 두엇 무리를 지어 나는 나비, 작은 풀 한 포기에 연신 감탄한다. 가끔은 비를 맞는다. 이렇게 하루 혹은 이틀이면 쌓여있던 소통의 부담이 어느새 반감되어 있다.


이제 몇 시간 뒤면 나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것이 그리 싫지 않은 것은, 거기가 내 집이요, 내 삶이요, 내 하루라는 것을 이전보다 더 선명히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나는 매우 즐거이 살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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