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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세계의 끝, 그리고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나 일기, 내 젊은 날의 일기 06


바람이 불어온다. 방금 전까지 비치던 태양이 구름뒤로 숨어 갑자기 추워졌다. 창문을 열어두고는 멍하니 창밖을 응시한다. 계절이 보인다, 봄이다. 봄은 늘 아쉽고 짧은 찰나다. 어영부영 들떠있다가 문득 고갤 들면 이미 여름이 되어 버린다. 늘 그랬다. 그래서 더 자세히 바라본다. 자꾸 멈춰 서서 봄을 찬찬히 읽어줘야만 다가오는 여름도 잘 맞이할 수 있더라. 바지런한 자연이 나를 두고 성큼 가버리면 유독 다음 계절이 허하다. 나만 혼자된 기분이 영 쓸쓸하기에 오늘도 나는 이 계절에 충실하게 조용히 계절을 만끽하고 있다.




2005. 06. 08 수요일(이렇게 요일이 적혀있는 일은 드물다)


*생략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고 있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외적 환경이라면 세계의 끝은 어떤 환경과 상황에도 상처 입고 싶지 않은 자신의 내부, 내적 이데아가 아닐까. 사람의 내면에는 절대고독, 절대평화, 절대고요의 비밀한 한 지점이 존재한다. 우리가 꿈꾸는 그 세계의 끝은 결국 내 속에 있다. 원더랜드의 다난함에 치이고 치여 그 안에 거하지 못한다 해도 말이다.

하루키의 무지막지한 상상력과 거친 말투에도 불구하고 하루키가 좋은 이유는 그가 본질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의 구조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잃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그 '본질‘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다. 본질이란 '삶과 사랑', '인간과 자연',' 세계와 자아' 등속이다. 그의 소설은 매우 모범적인 사상을 가진 비행청소년을 대하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늘 젊다. 그의 소설로는 도무지 육십을 육박하는 그의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내 상상 속에서 하루키가 여전히 서른 초반 혹은 중반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유독 이 일기가 눈에 띈 것은 굳이 많이 공감해서는 아니다. 그저 나의 독서는 오랜 습관이구나를 새삼 느꼈고 그것을 일기로 적어둔 정성이 갸륵해서다. 그리고 내 인생의 비중이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쪽으로 많이 치우쳐있는 건 아닐까에 대한 짧고 얕은 반성이 가슴을 '톡'치고('툭'도 아니고 '톡') 들어왔다.


변하지 않는 내적 자아, 무엇에도 침해받지 않는 평화, 결코 외롭지 않은 절대 고독은 나를 성장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원더랜드에서는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종류의 것이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고 다시 그 자리에 누울 때까지 내가 할 일이 정해져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원더랜드에 충실한 태도를 장착한 모범적 인간이라는 뜻인데 그 모범이 나의 내면에 정말로 이득이었을까. 나라는 사람에 대한 외적 보증이 내적 세계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까. 나의 시간은 얼마나 진짜 나를 위해 쓰이는가.


그런 질문을 던져본다. 눈으로는 봄을 읽으면서 말이다. 나는 요즘 외로운 것 같다. 나는 요즘 슬픈 것 같다. 내 내면은 치우쳐있는 것 같다. 감정이 나를 무너뜨리는 일이 자주 있다. 그렇다, 원더랜드가 내 '세계의 끝'을 자꾸 귀찮게 한다. 솔직히 인정하게 된다.


눈을 감아본다. 봄 읽기도 그만두고서. 감은 눈꺼풀에 빛이 보내는 붉은, 초록의 빛이 어린다. 나뭇잎 사이 바람이 지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이내 바람이 내 얼굴에 와닿는다. 알 수 없는 향기가 난다. 가슴은 여전히 따습다. 봄이 더 잘 느껴진다. 그리고 미소가 지어진다. 그렇다, 평화다. 원더랜드와 세계의 끝은 하나로 이어져 있으며, 그 길은 멀지 않으며 어쩌면 그게 그거다. 분리될 수 없고 분리되어선 안되고,결고 잊어서는 안 되는 세계의 끝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내겐 있다. 매우 다행스럽다.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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