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월세부부 Aug 23. 2020

별일 없이 잘 산다.

오늘은 처서다. 네이버에 물어보니 역시나 더위가 그친다는 뜻이었다.

처서 관련 속담으로 '모기도 처서가 지나면 입이 삐뚤어진다'를 보고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었다.


올해처럼 비가 지긋지긋하게, 그리고 특정 지역에 폭탄처럼 비를 퍼붓는 장마는 처음이다.

이제 장마 끝났구나! 하면 하늘에서 정말 그렇게 생각해? 하면서 비를 퍼부었다.

어젠 베란다 앞에서 내리는 빗방울을 보고 이건 빗방울이 아니라 포도송이 같은데...라고 중얼거렸다.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면 내 얼굴이 살짝 비칠 만큼 빗방울이 컸다.


날씨가 좋아서, 하늘이 좋아서, 모든 것이 좋아서 오랜만에 신촌에서 고깃집 하는 친구에게 연락했다. 요즘 어떠냐고 물었더니 대뜸 야! 말도 말아. 장마철에, 휴가철에, 코로나까지 쓰리 콤보다. 쓰리콤보!

이러면 장사 망하는 거지. 요즘 매출 바닥이다. 바닥.

그래도 임대료는 따박따박 내야지. IMF도 이렇지는 않았다고 하던데...

참. 어서 빨리 코로나가 어떻게든 마무리가 되어야 할 텐데...


아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친구도 알 것이다.

우린 이제 더 이상 코로나 이전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번엔 외국계 기업에서 개발을 하고 있는 친한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목소리는 여전했고 활기차 보였다.

어때 이직한 회사는? 여기요? 괜찮아요. 재택이라 편하고 만족스러워요. 아내한테 들어보니 요즘 일에 푹 빠져있다고 하던데... 하하. 맞아요. 요즘에 퇴근 찍고도 보통 10시까지 일하긴 해요.

이전 회사에는 하지 못했던 것들, 궁금했던 것들이 마구 쏟아지니까 그것들을 쫒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퇴근시간이더라구요. 정말 궁금한 것들은 아직 반도 알지 못했는데요.

지금 모습, 좋아 보인다. 무언가에 몰입하는 거,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는 거, 그건 축복인 것 같아. 내가 마음먹는다고 없었던 열정이 팍! 생기고 몰입이 순식간에 되는 게 아니잖아. 그렇죠.

9월에 부부 동반으로 보자. 그래요.


친구는 잘 버티는 중이었고

친한 동생은 새로운 회사에 가서 잘 적응해가고 있었다.


저녁에 청국장을 해 먹기로 했다. 냉동실에서 청국장, 마늘, 전복(어머니 감사합니다)을, 냉장고에서 김치, 감자, 양파, 새우젓, 된장을 꺼냈다. 냄비에 물을 적당히 붓고 김치를 가위로 잘라 넣고 청국장과 마늘을 넣고 해물 다시다 가루를 슥슥 뿌려 약불에 몇 분간 끓였다. 그런 후 남은 재료들을 시간 순서에 맞게 투하하고 된장과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고... 밥 먹자! 호박이 없어서 좀 아쉽지만 오늘은 전복이 센터니까 괜찮아. 너만 믿는다.


청국장은 구수한 냄새와 바다 내음이 어우러진 것이 맛도 괜찮았다(이래 봬도 자취 경력 17년이었던 난, 우리 집 셰프다).

아내는 엄지 손가락을 추켜올렸고 난 웃음으로 대답했다.


저녁을 먹고 하늘을 봤다.

파란 하늘은 청명했고 구름은 어찌나 하얗던지 솜사탕처럼 찢어먹고 싶었다.


문득 오늘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가 멈춰서 그럴 수도 있고

청국장이 맛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처서가 에어컨이 없는 우리에게 위안을 줘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행복이란 게 별거 아닌데 우린 생각보다 자주 행복한 순간을 놓친다.


남원예촌에 갔을 때 찍은 사진


바쁘다는 이유로,

승진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유,

자식이 잘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사실 내가 행복해야 다른 사람도 행복할 수 있는데 말이다

(물론 불교에서는 인생은 고통이라 했지만.. 여기선 패스~).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아무튼, 우린 별일 없이 잘 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