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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세부부 Sep 06. 2020

할게, 해줄게

부부생활

저에게 '해줄게'라는 말은 선물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아이에게나 아내에게 주는 선물 같은 거죠.

청소, 빨래, 설거지와 같은 집안일은 일상이지 선물이 아니죠. 

함께 해야 할 일들이라면 '할게'라고 해야죠.


우연히 TV를 틀다가 '속풀이쇼 동치미' 프로에서 채널을 멈췄다.

이 프로그램은 '당신의 답답한 속을 한겨울 동치미처럼 시원하게 풀어드린다'는 컨셉으로 주로 결혼한 부부에게 인기가 많은데 프로그램은 이미 시작한 상태였다.


패널과 게스트들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논쟁하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오늘의 주제는 '할게'와 '해줄게'였다. 할게와 해줄게라... 난 뉘앙스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머릿속에서 빠르게 할게와 해줄게를 이용해서 문장 몇 개를 만들어봤다.


내가 설거지 할게

내가 화장실 청소 할게

내가 젖병 씻을게


(오늘은) 내가 설거지 해줄게

(오늘은) 내가 화장실 청소 해줄게

(오늘은) 내가 젖병 씻어줄게


문장을 만들어보니 일단 난 해줄게라는 단어를 아내에게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고(다행이다~feat. 이적)

내 머릿속에 '할게'라는 단어는 to do list에 있는 수많은 일들을 아내와 동등하게 나눠서 한다는 느낌이라면

해줄게는 내가 원래! 그 일은 하지 않는데 오늘은 기꺼이~ 당신을 위해서 해준다는 선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 

정확한 의미 파악을 위해 네이버에 들어갔다.


'하다'는 그냥 하는 것이지만,

'해 주다'는 '하여 주다'의 준말로 이것은 본용언 '하여'에 '주다'가 붙어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주다'는 '남을 위해, 남이 원하니까, 남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여 행동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역시. 내가 생각한 대로다.

그래서 게스트가 해줄게라는 단어가 '선물'같다고 한 말에 한 패널이 화를 냈구나!

속초-영금정

난 자취 17년을 했다. 혼자 살면서 수많은 실수를 하고 절망하고 깨닫고 변화하고 원칙을 세우며 삶을 배워나갔다. 그리고 아내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난 아내와 8살 차이가 나지만 둘 다 어른이라고 생각했기에 연애 때부터 서로 존댓말을 했다. 지금까지도. 


그래서 그런지 우린 서로를 나이와 상관없이 어른으로 받아들인다. 즉, 둘 다 직장인을 다니는 동등한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바라본다. 그래서 퇴근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설거지가 수북이 쌓여있고 아내가 요란하게 진공청소기를 돌리며 나에게 왔어요?라고 인사를 하면 난 설거지는 내가 할게라고 말한다. 왜? 우린 어른이니까. 청소, 빨래, 설거지와 같은 일상적인 일들은 혼자 살건 결혼하건 누구나 예외 없이 해야 하는 일이란 말이다. 물론 집안 사정에 따라 남녀 역할에 따라 집안일을 혼자만 할 수 있지만 우리에겐 해당사항이 없다.


동치미에서 나오는 게스트 장광 아저씨,

나에게는 도가니 영화에서 변태 교장으로, 광해에서 내시 역할을 하며 씬 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했던 배우로 기억되는 아저씨다. 아무튼 동치미에 나온 장광 아저씨는 아내에게 유독 '해줄게'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 정말이지 말끝마다 습관처럼 해줄게~라고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장광 아저씨가 부엌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왔다. 오늘은 그가 큰 마음먹고 아내에게 설거지를 '해준다'라고 했기에.


그러나 그는 세제가 어디 있는지 음식물 쓰레기는 어디에 버려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결국 아내가 와서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자 드디어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 와중에 장광 아저씨가 고무장갑을 어디 있냐고 아내에게 물어볼 때는 나도 모르게 아~ 저 아저씨 진짜 설거지 안 해봤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저 아저씨가 하는 모든 행동이 짜인 대본에 의해서 하는 행동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줄게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즉 말하는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해줄게라는 단어를 듣는 입장은 그 단어의 의미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주로 아내들) 해줄게라는 단어를 들으면 

뭐지? 이 일은 나만 해야 하는 게 아니라 당신도 나처럼 동등하게 해야 하는 거야! 

누가 돈 벌줄 몰라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나도 예전에는 직장인이었다고!라는 생각과

뭔데 당신이 나에게 해줄게라고 이야기하는 건데? 무슨 내 상사라도 돼?

라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그러니 직장에서, 집안에서 각자 하루하루를 고군분투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늘부터라도 '해줄게' 단어를 지우고 그 안에 '할게'라는 단어를 채우자.


잊었는가?

결혼할 때 우린 서로에게 '꽃'이었고 시들어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빛이 되고 물이 되고 흙이 되어 

서로를 '꽃'처럼 아끼면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겠다고 맹세한 사람들이다.

상대방을 사랑으로 정으로 가족애로 전우애로 서로를 아껴주자.

내 아내가 내 일상이고, 보석이고, 행복인 것처럼.


아. 그리고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그렇다고 상대방을 바꿀려고는 하지 말자.

알겠지만 사람 쉽게 변하지 않고 변하면 죽는다.

지혜로운 부부라면, 현명한 부부라면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부모도 바꾸지 못한 그 성격을 내가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고 욕심이다.

그러니 수십 번 말투 바꾸라고 잔소리를 했는데 상대방이 여전히 해줄게라고 말하면 

더 이상 잔소리하지 말고 그냥 할게라고 말한다고 생각하길 바란다.

그게 정신건강에 좋다. 

치약 짜는 것 때문에 싸우지 말고 두 개 사서 각자 쓰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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