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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화 Jan 22. 2024

부디, 아무쪼록, 바라건대-


Hey, what’s up. How is it going.

조금 코믹하게 시작해 보았습니다만 장담컨대 이 글의 말미에 가서 저는 필화 님의 눈물을 받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유의 상큼한 목소리로 부르는 ‘가을아침’을 들으며 답장을 씁니다. 가을은 아니지만, 아이유의 목소리는 이 계절에 썩 잘 어울리네요. 문득 필화 님은 어떤 계절을 환기시키는 사람일까 잠시 생각해 봤는데, 여름이 잘 어울려요! 필화 님은 항상 생기가 넘치는 데다 뭐랄까, 본인의 말마따나 ‘물을 잘 주는’ 사람이잖아요. 뭔가를 쑥쑥 자라게 하는 계절은 역시 여름인 거죠. 음음, 생각할수록 잘 어울린다아. 저는 어떤 계절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인가요?



하지만 요 며칠 날씨는 아주 우중충했죠. 톤만 달리하는 회색의 연속이랄까요. 그래서일까요, 저는 흡사 싸이코패스의 일기 같은 조각글을 끄적거리고 있었습니다만 그것을 흘깃 본 열아홉 살 아이가 저를 굉장한 시선으로 보면서 “엄마...?” 하더라고요. 불신과 회의와 어딘가 쩜쩜쩜스럽기까지 한 물음이었지요. 응 나 니네 엄마 맞거든. 뭘 사람을 시리얼 킬러 보듯이 보고 있어(지가 쓴 문장이 뭐였는지 반성 따윈 하지 않는다)?


어떤 특이한, 평소와 사뭇 다른 감정에 사로잡혀서 불현듯 가상의 인물에게 이입해서 일기 같은 것을 끄적대는 기묘한 취미가 있거든요, 제가. 그런데 이게 의외로 굉장히 즐겁답니다. 근데 저는 저의 그.... 정신적 퀀텀 점프 능력이 저를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 마인드로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게 아닌가 싶어요.

친구 하나는 절더러 ‘앤 셜리’가 울고 갈 (허무맹랑한) 상상력의 보유자라는 타이틀을 달아주기도 했는데, 아무려면 어때요.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정신을 쾌적하게 관리할 수 있는 청정기를 갖고 있는 건 꽤 이득이거든요.




앗, 사담이 길었다.

그래서 지난주에 뭐 읽었냐면요, 새로 나온 《동경일일》, 《번역예찬》, 그리고 《시절일기》를 읽었어요. 《동경일일》은 만화를 너무 사랑하면서도 자신이 일하던 만화잡지가 폐간되면서 그 일에서 멀어지려 노력하던 편집자가 결국 자신의 꿈으로 되돌아가는, 그런 이야기를 그린 작품인데 너무 현실적인 데다 작금의 어려운 시장 상황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어서 저는 조금 마음이 힘들었어요. 하지만 훌륭한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번역예찬》은 절판된 책이라 넘어가도록 할게요. 그럼, 《시절일기》가 남네요?



저는 처음 김연수 작가님의 책을 접했던 순간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이 작가는 도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제목을 잘 짓지? 라고요. 한두 권이라면 편집자의 센스인가,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까지 이분이 쭈욱 냈던 책들의 제목을 되짚어 보노라면 이것은 작가님의 감각이구나 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겠더라고요.

그중에서도 지금껏 제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제목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이라니, 선영아》(이 책이 나왔을 때 포복절도할 수밖에 없었던 문화적 상황은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죠),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사월의 미, 칠월의 솔》. 특히 뒤의 두 권은 제목만 보고 한동안 입을 헤 벌렸던 기억이 여전히 선연합니다. 독자를 당기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가 뚜렷하게 느껴지는, 그런 제목이었으니까요.





《시절일기》는... 이 에세이랄까, 일기 모음집이랄까, 이것이 쓰여진 시기가 세월호 사건이 터졌던 시기와 맞물리는 까닭에 그에 관련된 가슴 아픈 글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 나이쯤 되면, 슬프고 아픈 일들이 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본인의 마음이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절로 외면하게 된다는 이들을 많이 보게 되어요. 저도 아니라고는 못 하겠는데, 그래도 어떤 고통들은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끝끝내 견디며 읽기도 합니다. 그분들의 고통에 빚지며 조금 더 나아진 사회에 기대어 사는 1인으로서의 아주 쥐꼬리만한 양심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그렇게 아픈 글들만 있지는 않습니다만, 전반적으로 이 책을 지배하는 주된 정서의 풍경은 깊은 애도와 상실의 감각입니다. 그 점을 미리 깊이 새겨두시고 책을 펼쳐주시기를 바라요.



변함없이 눈부신 그 여인의 말은 다음과 같다.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지극히 아름답지요. 그리고 늙으면 그 사실을 더 잘 알게 됩니다. 나이가 들면 생각하고 기억하고 사랑하고 감사하게 돼요.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지요. 모든 것에.”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점점 세상사가 못마땅해지는 내게 나치 수용소까지 다녀온 이 할머니가 덧붙인다. “나는 악에 대해 잘 알지만 오직 선한 것만 봅니다.” 이런 할머니들이 있어 나는 또다시 장래를 희망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나의 장래희망은, 다시 할머니, 웃는 눈으로 선한 것만 보는 할머니가 됐다. -31쪽


고통이라기보다는 불편함에 가까운, 우리 내부의 타자. 그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슬퍼한 뒤에야 우리는 우리 안의 이 타자를 애도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어떤 슬픔으로도 그 타자를 애도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타자에 대한 윤리의 기본은 그냥 불편한 채로 견디는 일이다. -44쪽


우리의 무능력한 사랑으로는 이제 그를 다시는 사랑할 수 없다. 그렇게 비탄의 시간이 흐르고, 우리의 몸으로는 더 이상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먼 훗날의 어느 날, 우리에게 바람이 부는 저녁이 찾아오리라. 그때 우리는 가만히, 그저 가만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다가, 문득 그 바람이 자신에게는 단 하나뿐인 바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70쪽




물론 제가 요즘처럼 콘텐츠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함께 손잡고 글을 읽는 동료 독자들에게 무엇을 읽자고 강권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가끔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쓴 글을 읽자고 청하고 싶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부사, ‘부디’를 곁들여서요. ‘부디’는 고작 2음절의 낱말이지만, 이 말이 끌어안고 있는 간절함과 곡진함을 그대로 전달하는 사랑스럽고 애절한 말이 다른 언어 어디에 또 있을지 문득 궁금해집니다(사실 제법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주로 소수민족, 종말을 맞기 일보직전의 언어일수록 이런 말들을 많이 품고 있더군요)



 ‘아무쪼록’‘바라건대’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기는 매한가지지만, 저는 ‘부디’에 한 표를 주고 싶어요. 어쩌면 우리말에는 이토록 섬세하고 다정한 결이 살아있는 말들이 많은지 저는 항상 놀라곤 합니다. 그런 말들이 존재한다는 건 뭐랄까, 우리말이 감수성의 해상도가 아주 높은 언어라는 의미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하죠. 근사하지 않은가요, 이런 언어를 가졌다는 사실이.


이런 대단한 언어가 보다 아름다운 일에 쓰여져야 하지 않을까요. 타인의 말꼬투리나 잡는 시시한 말싸움에 소진하기에는 너무나 아깝습니다.


부디, 당신의 하루가 무탈하기를 바랍니다. 이 편지의 수신인이 될 수 있는, 이 글에 들러주신 모든 분들의 하루와 그 하루에 닿을 또 다음 날이 무탈하고도 안전하기를요.






덴마크의 화가 빌헬름 함메르쇠이 Vilhelm Hammershøi의 그림 소개해 드릴게요. 통일된 색조로 읽히는 그의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정서가 있습니다. 쇠잔한 감정인 것 같기도 하고 그저 고즈넉하고 잔잔한 오후의 한때처럼 보이기도 하죠. 번거로우시겠지만 한 번 구경해 보시기를요. 이 화가의 서사가 절로 만들어지는 그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는 힘듭니다.

빌헬름 함메르쇠이 | 침실 | 1890



그리고 이 답신을 쓰며 내내 번갈아 들었던 음악 두 곡 함께 띄워 보냅니다.




심규선/부디

https://youtu.be/sjShIsv8HGk?si=y9qpXQ-gVyqEHJvl





J.Cardoso/Milonga

https://youtu.be/fmKVjTrSmaQ?si=ZQCNJL4Kf_Q7EWo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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