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화 Jan 29. 2024

판타스틱 포스트모던 액션 어드벤처란 이런 것이다!

《유정천 가족》

안녕, 항상 다정한 나의 친구 필화. 하지만 요새 너무 힘든 시즌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 됩니다. 잘 지내고 있어야 해요. 봄은 곧 옵(어린이들에겐 안 된 소리지만, 속히 날아오도록 하여라)니다.


겨울비 한 번 끝내주게 오네요. 눈보다야 비가 백 배 낫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만 그래도 그렇죠, 무슨 겨울비가 이렇게나 자주 온답니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엔 날씨 탓인가 에딘버러가 생각나요. 한여름에 갔었는데, 비가 내리는 7월의 날씨가 얼마나 소름 돋게 추웠는지 패딩이 생각났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서, 저는 기념품 상점에서 블랙워치 패턴이 들어간 캐시미어 머플러를 사서 그 초겨울 같은 한여름에 둘둘 감은 채로 에딘버러를 쏘댕겼더랬지요. 그 머플러는 남편을 처음 소개로 만났던 날에 두르고 나갔다가 신촌에서 잃어버렸더랬죠. 생각난 김에 물어내라고 해야겠습니다. 비쌌는데 말입니다…




제가 기록물 제조의 마스터인 건 익히 알고 계시겠죠(자랑스럽지 않다). 지난 독서 기록을 슬슬 살펴보니 말이죠, 제가 한 주간 읽는 책과 기타등등에도 어떤 경향성이 있더군요. 너무 당연한 얘긴가. 아무튼 조금 진지한 책을 읽으면 바로 픽션으로 병행독서를 강행하기도 하고 혹은 진지한 만화를 읽으면서 대중과학서 같은 것을 읽고, 뭐 그런 식으로 나름의 밸런스를 추구하고 있더군요. 대략 1주일 반 되는 시간 동안 읽었던 유쾌한 소설이 있는데, 그걸 소개할까 해요. 사실 필화 님은 짐작하고 계시겠죠. 왜냐하면 제가 중간중간 이것이야말로 내가 쓰고 싶었던 문장이라고!!라는 절규를 곁들여 몇몇 인용문을 카톡으로 연달아 보내는 성가신 짓을 했으니까요…


모리미 도미히코라는 작가가 있어요. 교토 작가라는 별명이 붙은 것으로 아는데, 그건 이 작가의 본진이 교토이기도 하지만 그가 쓴 작품(들)의 배경 역시 교토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나온 개정판에는 작가소개에 이 분의 교토대 진학썰이 빠졌더군요. 예전 번역본들을 보면 꼭 들어가 있는 말이 이거였습니다.


[교토대에는 이상한 녀석들이 잔뜩 있다, 라는 아버지의 말에 주저없이 교토대 진학을 결정했다]


벌써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폴폴 풍기고 다니셨던 겁니다, 이 작가는.

이 분의 이상한 유쾌함은 지금껏 출간한 작품들에서 여지없이 드러나곤 하죠. 예를 들면,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 에서 화자가 중요한 등장인물인 친구 오즈를 소개하는 말은 대략 이렇습니다. 밤길을 걷던 사람 열이 오즈를 만나면 대략 예닐곱은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라 나자빠진다. 놀라지 않는 나머지는 요괴다. 대강 그러한 내용이죠. 이 무슨 아름다운 우정의 말인지.


시종일관 비딱하고 코믹한 이 문체가 바로 작가의 고유한 문체이기도 한데, 한 번 빠져버리면 속절없이 포로가 되고 마는 무서운 중독성이 있습니다(그게 바로 나야 나). 귀여운 변태들이(??) 잔뜩 등장하기도 하고 사방팔방에서 일본의 신들과 요괴들이 현대에서 모험활극을 연출하는, 신나고 유쾌한 이야기들이죠.




그중에서도 《유정천 가족》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이 시리즈를 제 맘대로 줄여 부제를 달자면, 모던 텐구(네 그 일본 요괴 텐구 맞습니다)와 너구리 일족의 판타스틱 포스트모던 액션 어드벤처… 쯤 될 것 같네요. 지구 내핵을 뚫고 들어간 작명센스, 일단 사죄드리고요. 소설은 안 그렇습니다. 후진 것은 저의 센스지 작품이 아닙니다…


여하간, 이야기 속 교토에는 한물 간 텐구와, 그 텐구가 애지중지 길러낸 제자와 태연하게 인간 행세를 하며 지내는 너구리 일족들이 드글드글합니다. 저야 모르지만, 실제로도 교토에는 둔갑한 너구리들이 활보하고 다닐지 누가 알겠습니까.




이 책에 대해 뭐라고 소개해야 좋을까 몇 분을 고민했는데 답이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기본 설정 몇 개만 말씀드릴게요.


다다스 숲에 사는 너구리 명문 시모가모 가의 삼남, 시모가모 야사부로가 화자입니다. 시모가모 가의 너구리들은 은퇴하고 쇠락한 텐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데, 이 텐구 양반은 성질이 괴랄하기가 이를 데 없고, 제가 키운 미모의 제자인 벤텐의 환심을 어떻게 사 볼까 궁리하는 게 일상이죠. 게다가 벤텐은 너구리 야사부로의 동경의 대상이기도 한데, 야사부로는 매해 연말 너구리 전골로 회식을 하는 악식 집단 금요구락부의 (끓는) 전골 냄비에 아버지를 잃은 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벤텐은 아버지의 원수인 동시에 짝사랑의 상대인… 상당히 복잡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그런 인물이죠. 제가 적은 것만 보면 장르가 짐작조차 가지 않겠지만, 정말로 귀염뽀짝한 코믹 액션 활극입니다… 애초에 보송보송한 너구리들이 뭐 그리 험악한 플롯에서 뛰어논다는 게 말이 안 되죠.


이것이 유정천 가족 1(2009)의 내용인데, 10년도 훌쩍 넘어 2편이 번역되어 나왔다니 팬으로서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거럼. 난 언제 어느 때나 유쾌하지. (...) 나한테는 삼라만상이 엔터테인먼트거든.” -p.149


온천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우리 모두를 뭉근하게 끓여주는 전골이다. -p.299


같은 말을 하려도 좀 더 보들보들한 너구리적 커뮤니케이션이 있지 않나. -p.376


“왠지 몰라도 즐거워서 너구리는 크리스마스를 좋아합니다. 별 근거가 없다는 점이 특히 근사하죠. 그리고 켄터키 치킨은 맛있습니다. 그걸 싫어하는 너구리는 없어요.” -p.412



제가 인용한 문구만 보면 대체 이게 뭐 하자고 쓴 문장인지, 작가가 조금이라도 진지한 태도로 소설을 쓰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수도 있긴 해요.

하지만 간곡히 변명하건대 이 작품들엔 심원한 유머가 있습니다(새카만 유머도 있고 조금 더티한 유머도 간혹 있긴 하고…). 진짠데요. 하지만 평소 제 행실을 보면 역시 미덥지 못하려나요. ;- ;



제가 모리미 도미히코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것입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나 단어를 뻔뻔하게 병치하는 것을 엄청나게 잘해요. 그래서 처음엔 폭소하게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라’ 하다가, 종래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신선한 아이디어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라 이렇게 유쾌한 데다 재기발랄한 이야기를 보면 굉장히 행복해집니다. 인생, 정말 별 거 없더군요. 나의 최애 작가가 하나 둘 쌓이면 그게 최고예요. 


또 최근(이라기엔 한 달 넘었지만)엔 저의 one of favorite authors 중 한 분이 신작을 내셨거든요? 게다가 그건 연작이 될 것 같다는 엄청 기쁜 말씀을 하셨단 말이죠. Bravi My Life! 




#본격보들보들액션 #너구리도귀엽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