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
담화님
안녕...
개학일인데 그 댁 아이들 다 학교 가서 좀 평안하신지요?
저는,, 오늘 입학하는 어린이가 있습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내가 곧 갈 테니 엄마는 편하게 쉬고 있어요’라고 소식을 전해주었던 그 아기가 어느새 쑥쑥 자라서 초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부랴부랴 준비물을 챙기고, 바리바리 가방을 챙기는 아이를 보니 너무 기특해서 살짝 울 뻔했네요.
그 연장선상에서 담화님의 아버지께서 '맏딸이 좋아하는 잡지'를 사러 맨해튼 32번가의 고려서적을 매번 찾아가셨던 기분, 이걸 받고 무척이나 행복해할 딸을 그려보았을 그 마음을 생각하니 살짝 울컥하기도 했어요. 아마도 딸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잘 알고 계셨겠지요.
인생 참 이상하죠?
제가 아이를 보면서 느끼는 기분을 우리 부모님도 느끼셨을 터인데, 분명 우리는 부모님들께 사랑스럽고 기특하고 자랑스러운 자녀들이었을 터이고, 또 우리는 부모님을 참으로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였을 터인데. 지금 이 순간에 왜 이 부모님들과 우리 세대 사이에는 크고 작은 여러 갈등들이 존재하는 걸까요? 심지어 이 갈등이 세대를 거쳐서 여러 다른 형태와 색채로 반복될 것이라는 게 너무 아이러니합니다. 인간이란 도무지 성장이 없는 족속 같아 보이기도 하고요... 하.. 그럼에도 오늘만큼의 사랑으로 위아래 관계에 풀칠을 하고 덧대어 가며 살아보아요. 반목을 거듭하지 않기 위해 우아하고 품위 있게 살아도 보고요.
언젠가 스위스에 사시는 하릴 @Haril님이 삼청동의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언니, 우리 우아하게 살자~.”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청춘의 한 중간을 지나고 있었는지, 그 말이 마치 외국어처럼 이질적으로만 들려왔습니다. 자고로 청춘이라 함은 우아보다는 ‘열정’ 혹은 ‘에너지’라는 단어들이 어울리는 시기들이니까요. 그러나 강산이 두 번 변하고 이제와 보니, 그 말이 의미 있게 되새겨지곤 해요. 특히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에 하릴님의 그 말이 문장이 되어 눈앞에 떡 하니 반짝거리고 있었지요.
바로 <모스크바의 신사>라는 멋진 제목의 책입니다. 제가 읽다 말았고, 어디까지 읽었는지 찾느라 헤맸고, 그럼에도 다 읽지 못한 바로 그 책이에요. 왜냐하면 700페이지가 넘는 아주 두꺼운 책이거든요.
그럼에도 짧게 소개하자면 이 책은 러시아 혁명 이후로 한 호텔에 가택연금(?) 당한 한 백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이 로스토프 백작이 암울할 수도 있는 30년이 넘는 긴 시기를 얼마나 우아하고 품위 있게 그리고 자기답게 하루하루를 잘 살아내는지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답니다.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백작은 평생을 연금 상태로 지내야 하는 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이 목표를 이루려면 어떻게 하는 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지 궁리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프성에 갇힌 에드몽 당테스의 경우, 그의 정신을 말짱하게 유지해 준 것은 복수에 대한 생각이었다. 부당하게 갇혀 사는 동안 그는 자신에게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체계적으로 복수할 계획을 설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지켜나갔다. 세르반테스는 해적들에게 잡혀 알제리에서 노예가 되었지만 그에게 삶의 버팀목이자 자극제가 된 것은 아직 쓰이지 않은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엘바섬에 유폐된 나폴레옹이 닭들 사이를 거닐고 파리 떼와 씨름하고 진흙구덩이를 피해 걸을 때 그의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힘을 불어넣어 준 것은 싸움에 이기고 파리로 돌아가는 환상이었다.
그러나 백작에게는 복수의 기질이 없었다. 장대한 작품을 구상할 상상력도 없었다. 제국을 복원하겠다는 꿈을 꿀 정도의 공상적인 자아도 없는 게 확실했다. 그는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는 사람으로서 백작이 본보기로 삼아야 할 인물은 전혀 다른 종류의 억류자들일 터였다. 그것은 바로 해안으로 떠밀려 온 영국 국교도였다. 배가 난파되어 ‘절망의 섬’에서 살게 된 로빈슨 크루소처럼 백작은 실질적인 일에 헌신함으로써 자신의 결의를 유지해나가야 하리라. p.52~53
꽤나 앞단에 나오는 이 문장들은 앞으로 전개될 백작의 호텔라이프(=가택연금)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서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좌절과 절망, 복수와 성공에의 욕망은 커녕 혹은 고통이나 외로움 같은 심상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다만 인용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백작은 언제나 현실적인 일들을 하고, 예술을 사랑하고,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가 할 수 있는 소소한 일들로 일상을 채워나갑니다.
독자들은 그의 심경이 어떤지 모르지만, 그의 말과 행동들을 통해서 그의 우아한 자태와 걸음걸이와 옷매무새를 연상할 수 있을 거예요. 게다가 수다스럽지 않은 참견으로 타인을 배려하는 모습을 통해 사려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타고난 미식가적 감각이 있고, 여느 소믈리에 못지 않게 와인에 해박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지요.
작가가 의도적으로 드러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속마음과 생각을 구구절절 써내려가기보다는 담담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이야기를 만들어서 가슴이 저릴 일도 없고, 되려 줄줄이 이어지는 사건들로 인해 꽤나 흥미롭게, 재미있게 읽을 수가 있습니다. 꽤 두꺼운 책인데도 이렇게 톤을 유지하는 이야기를 쓴 작가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 백작에겐 열 한 살짜리 친구 나나가 생겨요. 호텔 마스터키를 가지고 백작은 나나와 함께 호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도 하며, 두 개의 레스토랑을 오가며 꼬박꼬박 식사를 하고, 와인을 마시고,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책도 읽고, 정기적으로 호텔 이발소에서 헤어컷을 하고, 호텔 내의 우체국에도 가면서 호텔을 눈 감고도 그릴 정도로 잘 살아냅니다. 그럼에도 호텔 연금생활은 쉽지 않아요. 결국 어느 날 백작은 죽은 동생을 기리고, 그 이후에 이 세상을 떠날 계획을 세웠지요. 그런데,,,
백작은 순순히 스푼을 입에 넣었다. 곧장 신선한 꿀의 익숙한 달콤함이 입안에 고였다. 햇빛 황금색, 즐거움을 나타내는 꿀의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백작은 계절이 이맘때인 것을 감안하면 이 첫 느낌에 이어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의 라일락이나 사도보예 환상도로의 벚꽃을 암시하는 향이 뒤따를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영험한 묘약같은 벌꿀이 그의 혀에서 녹자 백작은 전혀 다른 어떤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 꿀은 모스크바 중심부의 꽃나무가 아니라 풀이 무성한 강둑과... 여름날 산들바람의 흔적과... 퍼걸러의 아늑함... 등을 떠올리게 했다. 무엇보다도 그 꿀에는 꽃이 만발한 수많은 사과나무를 암시하는 또렷한 향이 있었다.
아브람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니즈니노브고로드.” 아브람이 많았다.
과연 그랬다.
명백히 그러했다.
“얘들은 수년 동안 줄곧 우리가 나누는 얘기를 들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아브람이 나직이 덧붙였다.
백작과 잡역부 노인 둘 다 지붕의 가장자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서는 150킬로미터 이상을 여행하면서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한 벌들이 이제 먼 여행의 한 점 목적지였던 자신들의 벌통 위를 별 모양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p.270
이 밤을 기점으로, 아니 정확히는 고향의 향이 담긴 꿀 한 스푼을 계기로 백작은 다시 현실을 살아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책의 후반부에서는 조금 더 능동적으로 그 생을 살아냄으로 투쟁하는 백작의 모습을 그려줍니다. (결말도 아주 재미있어요. 영화로 나와줬으면~)
최근에 애플티비로 보았던 <The New Look>이라는 시리즈물 얘기를 잠깐 해볼게요. 시즌1의 1편에서 2차 세계 대전 당시 코코 샤넬과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나치군을 대상으로 어떤 정치적 행보를 보였는지 보여주고 있어요. (2편부터는 못 봐서 매우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던 4년 중 마지막 2년 동안, 나치의 협력자들과 그 부인들을 위한 파티용 드레스를 만든 바 있어요. 후에 그에 대해 일부 대학생들이 크리스티앙의 부역을 저격한 질문을 할 때에,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생존을 위한 갈망”이라는 표현을 쓰며 자신에게는 “창조가 바로 그 생존이었다.”라고 답합니다.
정치적으로 부역하고 싶지 않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표면적으로 순응해야 했던 그의 삶 일부를 핀셋처럼 조명하는데, 정치적 압박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자기 자신을 지키며 살아간 모스크바의 로스토프 백작 생각이 나더군요. 심지어 책 속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생존을 위한 갈망”에 목말라하기보다는 생존 이상으로 “자신답게 사는 삶”을 잘 지켜내는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요.
어떻게 그런 삶을 견뎌내며 자신답게 살 수 있을까요?
담화님은 사부작의 대가이시니까, 가택 연금도 사부작사부작 스물아홉 개쯤 되는 취미생활을 하며 잘 보내실 수 있으시려나요? 저처럼 힘들면 힘들다고 어딘가에 털어놓고야 마는 인간은 정말로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작가는 로스토프 백작이 긴 시간 가택연금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그만의 생의 동력이 어디서 오는지 서두에서 은근슬쩍 알려줍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을 이야기하며 슬며시 이런 문장을 흘려둔 거죠.
할머니는 곧잘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곤 했었다. 인내라는 것은 그토록 쉽게 시험당하기 때문에 우린 인내를 미덕으로 여기는 거야... p.228
담화님
우리 사는 동안 내내 품위 있으려면 생의 고비마다 인내를 미덕삼아 견디며, 자신답게 혹은 우아하게 살아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남편과 이 책 이야기를 하며 조금은 더 품위 있는 어른, 혹은 노인으로 늙어가 보자고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인간의 생에는 존엄성과 생명 외에도 지켜야 할 게 있으니까요.
SF를 사랑해마지 않는 우리 담화님.
담화님의 매력적인 우아함에 오늘은 좀 매달려 하하 호호 웃고 싶었는데 바빠서 전화도 못 드렸군요. 아쉬워라. 오늘 부쩍 날씨가 따뜻해졌어요. 덕분에 행복한 산책 하셨으려나요?
부디 힘들었던 겨울 짐을 벗어버리고 가뿐하고 상큼한 3월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 그리고 지난 주에 읽으신 책 중 한 권만 알려주세요~
3월. 따뜻해지는 어느 날.
필화 보냄.
덧붙임. 로스포트 백작이 뿌듯해하던 러시아의 자랑 중 하나를 소개해볼께요.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발레 공연 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