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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화 Mar 11. 2024

이름 붙이지 못한 마음의 사잇길들을 위하여

《눈에서 온 아이 The Snow Child》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필화 님. 답장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었습니다. 오늘 아침 별생각 없이 다이어리의 다음주간 계획을 점검하다가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더군요. 허겁지겁 책들을 챙겨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이런 저를 부디 용서하시기를.


우선, 멋진 책 소개 감사합니다!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 저도 꼭 읽어야지 벼르고 있던 책입니다. 왜냐면 제가 그 작가의 《우아한 연인》을 굉장히 인상 깊게 읽었거든요. 사실 원제인 《Rules of Civility》가 훨씬 좋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을 내내 읽는 동안 화자인 그녀에게 우아함 말고 과연 무슨 단어가 어울릴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긴 해요. 우아하다는 것은 대체로 무언가를 수식하는 말이지만, 적어도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 우아함은 그녀를 꾸미는 말이 아니라 그저 그녀의 본질을 드러내는 말 같달까요. 그저 두 권을 놓고 말하기엔 섣부른 감이 있지만, 에이모 토울스는 인간의 품위랄까 격, 이런 것에 관심이 많은 작가가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우아한 연인》에 제가 플래그를 붙여둔 페이지를 보니 이런 문구들이 있네요.


아버지는 살면서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아무리 풀이 죽고 기운이 빠져도, 자신이 언제나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 처음 커피를 마시는 순간을 고대하는 한은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나는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아버지가 내게 해준 조언이었음을 깨달았다. -209쪽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여행보다는 허니문 브리지와 더 가깝다. 20대 때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 그래서 뚜렷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수많은 꿈을 좇다가 다시 방향을 바꿔도 시간이 충분할 것처럼 보인다. 게임을 하면서 카드를 하나 뽑으면 그 카드를 그냥 갖고 다음 카드를 버릴 건지, 아니면 먼저 뽑은 카드를 버리고 그 다음 카드를 가질 건지 곧바로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탁자 위에는 우리가 뽑을 수 있는 카드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방금 내린 결정들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우리 인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517쪽



우리가 이런 삶의 지혜를 대물림받지 못했다 한들 뭐 어떻습니까. 세상의 많은 책들이 이렇게 알려주고 있는데 말이죠!

더불어 소개해 주신《모스크바의 신사》의 주인공도 제가 무척 좋아하게 될 것 같은 인물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필화 님은 어떠실지 모르겠는데, 저는 나름 ‘친구라고 여기는’ 책 속 등장인물들의 인명록을 갖고 있거든요. 픽션과 논픽션을 가리지 않고 상대의 의사는 결코 확인할 수 없는 일방향적 우정이지만, 아무튼 꼭 한번 친해져 보고 싶은 인물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 그건 그렇고 말입니다.


《우아한 연인》은 현장감이 무척이나 선명한 소설이기도 하거든요. 제가 지난주에 읽었던 책들 가운데 그렇게 STRONG SENSE OF PLACE를 가진 소설이 하나 있어요. 그런데 이 책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조금 고민한 이유는… 이 책은 절판본이에요…


아무튼 가보겠습니닷.



《눈에서 온 아이 The Snow Child》라는 소설이에요. 작가는 에오윈 아이비라는 분인데, 작가 이름을 보자마자 "어…?" 한 분이 있다면, 맞습니다! 로한의 레이디, 에오윈과 같은 이름이에요! 《반지의 제왕》시리즈의 열렬한 팬이었던 어머니께서 에오윈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하네요. 와, 어떤 마음으로 그 이름을 지어주셨는지 금세 알겠더라고요. 아무튼 그건 TMI였고.


판타지 소설이지만 이야기의 배경이 된 알래스카의 묘사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읽는 내내 와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알래스카가 작가의 고향이더군요. 읽는 내내 알래스카에서 달달 떠는 기분이었… 그랬습니다.


동부에서 가족을 떠나 도망치듯 야생이나 다름없는 알래스카로 이주해 온 중년의 부부가 주인공입니다. 그들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지역으로 떠난 이유는 조금 슬퍼요. 첫 아이를 사산한 뒤 부부에게 결코 아이가 다시 찾아오지 않았거든요. 겨울의 한복판에서, 부부는 장난처럼 진짜 사람처럼 보이는 아이를  눈으로 만들고, 모자도 씌우고, 옷도 입혀주며 어쩐지 애틋한 기분에 젖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이튿날 눈 아이는 사라지고 정체 모를 여자아이가 언뜻언뜻 모습을 비추어요. 부부를 잔뜩 경계하면서도 이들의 집 앞에 선물처럼 무엇을 갖다 놓는다거나 하며 소녀는 부부의 삶에 조금씩 끼어들죠.


... 여기까지 쓰고 나니 어쩐지 ‘뻔히 보이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적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만 예측 가능한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다가, 플롯은 예상 밖의 물줄기를 타요. 작가가 이 소설을 구상할 때 독자에게 불러일으키고 싶은 감정 서사를 먼저 스케치하고 플롯을 붙인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선명하게 어떤 마음들이 일어나곤 하거든요.


눈이 녹아 축축해진 강기슭의 흙냄새, 오래된 잎과 새잎과 나무뿌리와 나무껍질 냄새. 메이블은 자신과 파이나가 여전히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파이나의 손은 아주 가녀리고 차가웠으며, 메이블의 심장은 가슴에 뚫린 구멍 같았다. 얼음처럼 차고 달콤한 물로 채워지는 우물 같았다. -219쪽


“두려워 말아요, 메이블.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삶은 언제나 우리를 이리저리 내던지죠. 거기서 모험이 시작돼요.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죽을지는 알 수 없어요. 삶은 수수께끼이고, 그걸 부정하는 건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랍니다. 말해봐요. 당신은 언제 살아 있다고 느끼죠?” -356쪽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를 막연히 예상하고 있으면서도 그 길을 걸어갈 용기를 내는 사람의 모습은 모두 제각각이죠. 그 모습을 지켜보며 따라가는 우리도 덩달아 조마조마하면서 응원하게 되잖아요? 하지만 결국 그 순간이 닥쳤을 때 곁에서 손잡아줄 수 없음에 마음이 애잔해지죠.


소설을 읽는다는 건 그런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다양한 기쁨과 내가 알지 못했던 수많은 슬픔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사이에 누구도 이름 붙이지 못했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마음의 결들이 나풀나풀 나부끼고 있음을 순간순간 감각하는 일이요. 그럼으로써 세상을, 타인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는 것.


저는 그 전주보다도 3cm정도는 품이 넓어진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기대해 봅니다. 필화 님의 지난주와 함께 한 책은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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