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화 Feb 29. 2024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

《작은 땅의 야수들》

담화님

안녕..


늘 반가운 편지 잘 받았습니다.


정체성이라... 청춘의 시절 한 움큼을 고민했던 주제군요. 여전히 삶이 계속되어 가기에 정체성의 규명에 대한 의심은 늘 저어기 어딘가에 꼬물락대면서 존재감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언젠가부터는 ‘정체성’이라는 게 고민한다고 해서 갑자기 나타나서 불꽃놀이처럼 발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각자 정의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긴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담화님만이 보여줄 수 있는 텍스트의 풍경은 이미 그 영혼 안에 잘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해요. 담화님의 정의 아래 잘 피어날 겁니다. 봄날의 어느 영국 정원처럼 아름답게요.



김겨울 님의 《겨울의 언어》 중에서 인용해 주신 문구가 마음에 훅 들어오며 감사가 몰랑몰랑 올라왔습니다.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동시성의 감각이다. 같은 시간에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일. 같은 세상을 공유하는 일. -41쪽

비록 우리가 이렇게 서간문을 주고받으며 그야말로 ‘같은 세상을, 우리가 읽고 사유하는 세상을’ 공유하고 있잖아요? 저에게 ‘글 동무’라는 친구가 있다면 아마도 긴 학창 시절을 다 건너뛰고, 육아에 지쳤던 시절도 다 건너뛰고 이제야 글 동무로 다시 만난 우리 담화님일 겁니다. 동시성의 감각을 공유하는 즐거움을 맛보고 있으니 이 어찌 아니 즐거울 수가!!!



게다가 이 문장!

"I am not what happened to me, I am what I choose to become."

- Carl Jung


이 문구를 저는 이렇게 바꿔보겠습니다.

"I am not what happened to me, I am what I read." 


비록 지금은 제가 한창 때(?)처럼 책을 마구 읽어내리지는 못하지만, 읽었던 책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특히나 어떤 문장에서 공명이 될 때, 나의 자아가 확장되곤 하니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쌓여가며 정체성을 굳게 만들어주겠지요. 마음 어딘가에 내가 단단히 세워져 가는 것도 알게 되고 말이죠.




저는 지난 주에 미처 다 읽지 못하였다고 고백하였던 《작은 땅의 야수들》 이야기를 마저 해볼까 합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이 긴 이야기의 끝에 가서야 저는 울컥하며 한 단락에 찡-하고 마음이 닿아버렸습니다.




삶은 견딜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 p.603


지난 2주 간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왜 내가 아직도 살아있지?’라는 의문을 되새기곤 했습니다. 정말이지 곤핍한 날들이었으니 말이죠. 그런 시간을 견디게 해 준 것은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책은 일제강점기가 주요 배경입니다.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 고통의 시기를 지나온 여러 주인공들에게 각인처럼 새겨진 생의 일각들을 읽으며 ‘살아내는 것이 삶이고 용기’라는 것을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드러났던 몇 구절을 소개하고 싶어요. 조금 길기는 합니다만...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오직 그런 금이 난 곳으로만 내뿜어져 발산되는 진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 술이나 아편 같은 거라도 없으면 다들 어떻게 버티겠어? 자살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늘어날걸.” 옥희는 감기처럼 흔해진 증상이 된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가끔은 사람들이 그냥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평범하게 아침을 먹고 이제 목매달아 죽자고 결심하는 것 같아.”


정호가 걸음을 멈추고 옥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야,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다소 거친 어조였다. 옥희는 잠시 기분이 상했지만, 정호가 다시 걷기 시작하며 이렇게 덧붙이자 그런 마음은 금세 사라져버렸다. “난 살면서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이 수없이 많았어. 그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 그 죽음이라는 게 몸으로 느껴지더라. 가끔은 묵직한 이불 같지. 배고픔에 시달려 몸속에 남아 있는 힘이라곤 단 한 줌도 없을 때 말이야. 또 가끔은 내내 구석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덤벼드는 사나운 개 같기도 해.” 정호는 폭발하듯 빛을 토해내며 스러져가는 마지막 햇살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때마다 나는 알아채. 그냥 죽음이 나를 데려가도록 내버려 두면 더 쉽고 덜 고통스러우리라는 거. 나 따위가 오래 잘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그리고 마지막 순간마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정호의 물음에 옥희는 겁에 질린 채 고개를 저었다. “그 죽음에 굴복하거나, 아니면 거부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명확한 기회가 주어져. 난 매번 거부했지.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내가 죽어야 할 이유가 많을수록, 그렇게 포기하고 싶어지지가 않더라.” 정호가 말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 누구도 내 빈자를 그리워하지 않더라도, 그래도 사는 게 죽는 것보다는 여전히 나은 거야.” 이번에는 옥희가 멈춰 서서 정호를 빤히 노려볼 차례였다. “네가 죽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말 좀 그만했으면 좋겠어. 그럼 나는 뭐니?”

“너만 신경 써준다면, 나한테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 와, 그럼 난 절대 죽지 않을지도 몰라!” p.426~427




옥희는 라일락 향기와 함께 이 모든 소리를 깊이 들이마셨다. 주변의 모든 곳에서 삶은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계속 나아가는 중이었고, 그들의 삶 역시 다른 모든 것이 존재하는 세상 안에서 나아가고 있었다. 모든 존재가 공기처럼 가볍게 서로에 가 닿으며 투명하게 반짝이는 지문을 남겼다. p.429




“하지만 넌 싸움을 겁내지 않는 투사이기도 했어. 그래서 네가 남들과 달랐던 거야. 언젠가 나를 물어뜯은 적도 있잖아. 기억나나? (중략)

“난 한때 사랑했거나 아꼈던 모든 사람을 잃었어.” 옥희의 목이 메었다. “이제 내겐 싸워서 지킬 것도 없어.”

“아 그런 건 상관없어. 죽을 때까지 싸워야지. 그게 바로 관건이란 말이야.” p.509




“나한테 감사할 건 없고, 그냥 내가 했던 충고나 기억해. 난 이번 금요일에 떠나니까 아마 지금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는 거겠지... 빌어먹을 전쟁 따위도, 외로움 같은 것도, 다 엿이나 먹으라고 해. 계속 살아남아.” p.514




담화님은 살면서 ‘이 순간은 이 책과 함께 살아왔다’라고 느낀 책이 있으셨을까요?

제게는 이 책이 아마 그런 기념할 만한 책일 것 같습니다. 2024년 2월은 이 책과 함께!라고 말이죠.


조금 무거웠을까요?

견딜 만한 것이고, 살아볼 만한 것인 제 삶을 이 땅의 야수들처럼 용기있게 살아내기 위해서 이번에는 재미있는 책을 연료로 삼아볼까 해요. 예전에 재미있게 읽다가 도중에 기억나지 않는 어떤 이유로 중단되었는데, 글쎄,,, 책갈피를 세 개나 다른 곳에 끼워두었는데, 심지어 그 어느 것도 중단된 페이지가 아니라, 해당 지점을 찾느라 헤맸지 뭐예요. 마저 읽어보겠습니다.


담화님은 지난 주에 어떤 재미있는 책을 읽으셨을까요?

다음 주 개학이더라고요?
 그런데 1학년은 점심 먹고 바로 집에 오던데요? 세상에.




덧붙임.  《작은 땅의 야수들》 기획자와 번역가의 인터뷰입니다. 번역이 상당히 잘 되어 있는 책이라서 역자가 궁금했는데 이렇게 또 좋은 영상이 있어서 소개해 봅니다. 꽤 재미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1cIj-Pv5zc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