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언어>
필화 님, 편지 앞머리를 읽다가 그 시절 제게 롱바케를 전파하셨던 것이 기억나서 웃었어요.
최근의 기무라 타쿠야 사진을 어쩌다 보게 되었었는데, 아… 보지 말 것을 그랬나요. 추억은 추억으로만 간직하는 것이 좋았으려나요. 한편으로는 저 역시 그때와는 같은 모습이 아님에도 그들의 젊은 시절의 광채가 사라진 모습에 살짝 실망하는 제게 조금 환멸을 느낍니다.
어쨌건, 그로부터 저의 일드 삼매경 시즌도 제법 오래 갔는데, 필화 님이 네이티브 수준으로 언어력 스탯 최고치를 찍으시는 동안 저는 뭘 한 걸까요. 저는 이제 둘째가 저한테 일본어로 뭐라뭐라 떠드는 것도 하나도 못 알아듣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한심하여라.
여하간, 그때의 추억이 새록새록하여 키들대며 웃다가 인용해 주신 윤동주 시인님의 말씀에 이르러 저는 폭풍오열을 했습니다. 반차를 내고 집에서 쉬고 있던 남편이 놀라서 달려올 정도로 꺼이꺼이 울었어요. 왜냐면, 왜냐면 말이죠.
'제 시는 사랑을 받고 있나요. 그 때쯤은 독립을 했을런지요.' 라고 조심스러운 궁금증을 남기신 시인님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조금쯤은 짐작이 갔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삶이란 것이 누구나 공평하게 불안이라는 망망대해를 건너는 일이라지만, 그럼에도 구체적인 누군가에게가 아니라 막연히 미래에 대고 물을 수밖에 없는 그 막막한 심정을, 그럼에도 희망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을 너무나 알 것 같기 때문에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음에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계속하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었던 그 시절의 많은 이들을 생각하면 숭엄하다는 말이 절로 떠오릅니다. 피하지 않고 기꺼이 감당하려 하는 그 모습이 말이죠. 설령 픽션의 인물이건, 역사의 인물이건 관계없이 말입니다.
믿거나 말거나입니다만 여기까지 쓰는데도 티슈를 다섯 장을 더 썼습니다. 와, 좀 질리는 구석이 있군요, 저란 사람은.
아시겠지만, 저는 주기적으로 책을 정리합니다. 그렇잖고서는 수납 공간 감당이 안 되기 때문에요. 그렇게 정리해야겠다 마음먹고 꺼내놓은 책들 중에서 하나를 다시 넘겨보기 시작하다가 다시 후루룩 읽게 되어, 아, 이번주엔 이 책 이야기를 해야겠다 생각한 것이 있어요.
책 좋아하는 사람치곤 이 분을 모르는 이가 없을 텐데, 김겨울 작가의 최신간입니다.
<겨울의 언어>라는 책이고, 겨울 같은 느낌의 표지를 입고 있네요. 작가의 필명이자 활동명을 고려하면 중의적인 제목이라 할 수 있겠고요.
서문에서
겨울의 언어는 겨울을 부르는 언어일까, 겨울을 나는 언어일까?
라고 글머리를 열고 있는 것을 보면 계절감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죠.
다만 첫 번째 ‘겨울’은 ‘윈터’일 수도 있고 ‘김겨울’일 수도 있겠네요.
저는 이렇게 독자를 갸웃거리게 하는 문장을 아주 좋아합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의 책들과 달리 책을 관통하는 중심이 없다며, 그런 까닭에 김겨울을 아주 솔직하게 드러내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일말의 불안감마저 비쳐 보이죠. 하지만 지금까지 김겨울의 모든 책들을 읽어오고 방송도 빠짐없이 들었던 1인으로 감히 말하자면 김겨울의 모든 산출물이 그러했듯 이 책 역시도 너무도 김겨울답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겨울 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이렇게 한결같은 톤과 시선을 유지한 채 글을 쓰는 작가의 새 책이 나오면 굉장히 반갑더라고요. 익숙한 편안함이 있지만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발상과 관점이 있고 말예요.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동시성의 감각이다. 같은 시간에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일. 같은 세상을 공유하는 일. -41쪽
그럼에도 자기계발서에 손이 잘 가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인데, 그것은 자기계발서가 홀로 닫힌 세계이기 때문이다. -74쪽
이런 문장에서는 대단한 통찰력이 느껴지고요.
많은 사람들이 읽는다고 해서 수명이 연장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 각각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 그러니까 읽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신만의 회로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 그 회로는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남들이 도달하지 못한 곳을 먼저 도달하면 된다.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이야기,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 쓰인 적 없는 유머, 고려된 적 없는 표현, 구성된 적 없는 플롯을 쓰면, 그 책은 뇌에 선명한 자신의 길을 남기게 되고, 오래도록 기억된다. -134쪽
이런 대목에 이르면 원론적인 고민으로 되돌아갑니다. 아무도 보지 못한, 나만이 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텍스트의 풍경은 어떤 것인지를요.
이것이 꼭 글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 같습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고민은 결국 ‘그래서 내가 누구지? 나는 남과 뭐가 다르지?’로 귀결되는 것 같아요.
저는요, 저는 말이죠… (동공지진)
"Self-knowledge is not knowledge but a story one tells about oneself."
- Simone De Beauvoir
"I am not what happened to me, I am what I choose to become."
- Carl Jung
정체성에 관한 유명한 말들이 많지만 저는 이 두 가지가 가장 맘에 들어요.
그건 그렇고, 이왕 정체성 이야기로 흘러들어왔으니 책 두 권 더 추천하고 갈게요. 그림책이고요, 황성혜 작가의 <파랗고 빨갛고 투명한 나>, 데이비드 섀넌의 <줄무늬가 생겼어요>. 심오하고 아름다운 그림책이랍니다.
우와, 3월이 코앞이에요! 봄이에요, 봄! (봄보다 더 기쁜 것은 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