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말들》《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
필화 너는 아느냐. 내가 인사말을 다섯 번째 새로 입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 hey ya, whatssup. 제가 이러면
필화 님은 이스트코스트 바이브로 how are you doing, 하시려나요.
그런데 문득 정말 우리의 문체도 그만큼이나 다르지 않은가 하는데에 생각이 미칩니다. 우리의 문화적 디엔에이, 혹은 떼루아르가 다르니까 당연한 일이지 싶습니다만. 그러고 보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이메일을 주고받는 것도 어쩌면 문화적 테라포밍 프로젝트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거국적인 망상이 듭니다. 뭐, 제가 하는 일의 특성상 저는 늘 상상력이 합리성의 영역을 피슷- 순간초월하고 마니까요.
그리고 이건 좀 진지하게 짚고 넘어가야겠는데,
아니 연예인이라니요 ㅋㅋㅋㅋ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같은 소리랍니까. 그리고 엔프피는 누가 엔프피입니까! 나 아니라고!! 저는 확신의 J입니다. 그러니까 소위 엔프제.
저 역시 환원주의는 극도로 경계하는 편인데 MBTI 역시 그 비판에서 벗어나기 힘든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환원주의가 주는 편의성 또한 있음을 부정해서도 안 되겠죠.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김안로 같은 소리이긴 합니다. 넘어가죠.
이건 끝장토론이 아니지 않습니까(그리고 제가 필화 님과 끝장토론해서 이길 수가 있기나 합니까. 물론 상상력 대결에서는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만 논리력으로는 그냥 백기 먼저 듭니다)?
그, 청춘에 관한 감사 인사는 거침없이 고맙게 받겠습니다.
저는 60이 되어도 철딱서니 없이 젊게 살 자신이 있거든요(웬 근자감…)
사무엘 울만이었던가요, 우리가 20대 때 <청춘>이라는 시가 꽤 유명했었는데. 기억하시나요? 저는 그때 그 시를 보면서 그리 생각했더랍니다. 나이 들면 든 거지 참으로 구구절절하시다… 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시인이 괜히 시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역시 자신의 일이 되어 봐야 깨우치게 되는 건데, 어린놈이 뭣도 모르고 까불었다는 뉘우침을 이제야 통렬하게 뱉습… 그만하자.
SF에 대한 고견도 잘 읽었습니다.
SF의 훌륭함에 대해 설파하는 멋진 글들이 아주 많은데, 제가 가진 책 중 한 대목을 인용해 보려고 해요.
《SF와 함께라면 어디든》이라는 책입니다.
“이처럼 SF는 비현실을 가정하지만 그렇기에 현실을 넘어선 세상을 구상하도록 돕습니다. 우리는 SF를 통해 다른 방식의 삶을 배웁니다. 바꿔 말하면, 비현실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현실을 익힙니다. 그렇게 SF는 “우리가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현실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SF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SF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의 문제를 읽곤 합니다. 그리고 좋은 질문은 좋은 답으로 가는 첫걸음이지요. -p.19”
말씀하신 테드 창의 책은 저도 아주 좋아합니다. 이런 엄청난 글을 쓰시기 때문에 과작을 하시는 거겠지요. 최근 10개월간 대략 원고지 N***(N>7) 장 분량을 쓴 저는 orz포즈로 바닥을 치겠습니다. 이제 제가 믿을 건 양질 전화의 법칙밖에 없습니다.
표제작을 읽었을 때의 그 충격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필화 님이 이 단편을 안 읽으셨다고 해서 설명을 붙여야 하나 잠시 고민했는데, 분량 문제로 스킵하겠어요. 여하튼, 저는 이 작품을 읽었을 때 처음 한 생각이 그거였어요.
역시나 새로운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지금껏 모르던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로구나. 아름다운 비유와 참신한 아이디어에 고대 그리스식 비극의 미까지 구현한 SF라니, 실로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오이디푸스적으로 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주인공을 보면 절로 숙연해지지요.
필화 님도 모어 제외하고 2개 국어를 하시는 분이니 또 다른 견해를 갖고 계실 수 있지만, 저는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뜻밖에도 언어를 증축하기보다 신축하는 쪽에 가까운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외국어 학습을 기존의 모어 구조물에 증축하는 방향으로 접근할 때 빠르게 한계에 부딪히는 게 아닐까 하는 지레짐작도요.
그러니까, 모어에 1:1 대응하는 방식으로 외국어를 학습하면 순식간에 정체가 온다고 생각해요.
그보다는 아예 새로운 개념과 의미의 집을 짓는 거죠. 처음에는 이쪽이 훨씬 어렵겠지만, 분명 결과물이 다를 거라고 생각… 솔직히, 네가 뭔데?라는 욕을 먹을 것을 각오하고 발언한다면… 확신합니다.
제 주변의 언어 천재들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있긴 합니다. 우리말로 이건 무슨 뜻이야,라는 발상을 하지 않더라고요. 예를 들어 beauty라는 단어를 보면, beauty는 그냥 beauty로 그들의 머릿속에 집을 짓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텍스트와 맥락을 학습하여 beauty의 개념의 방을 만들어 나가는 거죠. 그런 식으로 수많은 복도와 층이 생기며 레고 블록을 쌓듯 새 언어의 집을 짓습니다. 어지간한 외부의 충격에는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그런 건축물이죠.
당연히도, ‘beauty’를 ‘미’라고 학습한 경우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향상의 속도가 더디지만…
아, 그냥 말을 줄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학습법은 힘들다고요. 환경이 맞지 않는다고요. 그런 반박을… 저는 집에서도 동행에게 많이 듣습니다. 그 말도 맞기 때문에, 할말하않 모드가 자동 발동되네요. 적당히 줄일게요.
서설이 긴 것은 제 특징 중 하나이므로 이제 슬슬 본론이 나올 때가 되었구나 하고 계시겠지요. 오늘의 책은 다와다 요코의 《여행하는 말들》입니다. 다와다 요코는 독일어와 일본어에 능숙한 이중언어 구사자입니다. 두 언어로 소설을 쓰시고 강연도 하시죠.
이 책에서 내내 테마로 삼는 것은 exophony인데,
정확한 뜻을 짚어드리기는 쉽지 않지만 ex- 와 -phony로 나누면 이해가 쉬울 것 같아요.
나는 사람들이 외국어 수업을 들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책에 ‘엑소포니’란 말을 쓰지 않았다. 모어에서 한 발짝 떨어져 외국어를 통해 자기를 다시 발견하고 인간관계를 다시 생각하고 세계사를 다시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책을 썼다. 이것은 아주 큰 정신적 모험이다.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것이 흔들리는 일은 반드시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하지만 그 불안과 불쾌함은 결국에는 밝은 해방감으로 변모할 것이다. p.6
저는 이 말에 물개박수를 칩니다. 필화 님이 이미 R1에서 보여주셨듯, 하나의 언어에 있는 단어가 다른 언어에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죠. 언어라는 것은 닦아 쓰면 쓸수록 내게 있는 줄도 몰랐던 어떤 것들을 비춰주는 핀라이트 역할을 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 언어에 잠재하지만 아직 누구도 보지 못한 모습을 끌어내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언어에서 표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란 문제에 접근하는 데는 모어의 외부로 나가는 것이 하나의 유효한 전략이다. 물론 밖으로 나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외국어 안에 들어가 보는 것은 그중 하나일 뿐이다. p.26
저는 이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사람으로 줌파 라히리를 떠올립니다. '창작자에게 안정감은 위험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자신을 그런 상황에 몰아넣을 수 있는 결단력과 기어코 해내고야 마는 그 강인한 정신력은 인간의 것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아니 모어 대신 새로 배운 이탈리아어로 에세이를 쓰는 것도 모자라 소설을 쓰다니요. 진정한 천재 아닙니까? 자고로 천재는 빈둥대야 하는데 노력하는 천재라니... 진짜 만인의 적이라고요. ㅋㅋ
그리고 제게 주신 질문을 끝까지 미뤄봤는데 답해야 할 순간이 왔네요. 지금 쓰고 있는 거… 어떤 거 말씀이신지. ㅋㅋㅋ 저는 뼝아리인 주제에도 동시 N작 집필이라는 맹랑한 일정을 소화하는 중이랍니다(통곡…).
첫 작은 정말 우연히 '제가 당시 겪고 있던 어떤 문제를 결핍으로 안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삶은 어떨까. 그 결핍 대신 어떤 능력을 갖고 있다면 인생이 어떻게 바뀔까?라는 질문이 튀어나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게 그런 장편이 될 거라고는 처음에는 상상도 못 했었지만요.
오늘은 유별나게 글이 길어진 느낌입니다. 저는 이만 사라질래요. 빠잇!
How are you doing, 담화? (I‘m Fine. And you? 까지가 자동재생 구간입니다.)
코리안 텍스트북 스타일은 어떠십니까?
이 서간문을 문화적 테라포밍 프로젝트로 보신다니 정말 거국적이긴 합니다만, 모든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의 출발점은 늘 아주 작은 포인트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일단 열심히 쓰면서- 지켜보도록 할까요.
사실 저는 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확신의 J님’ 덕분에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라는 시를 읽어보니 첫 줄부터 명치를 때리는군요. ‘사람들이 이래서 시를 읽는구나..’ 하며 그 행간이 압축해 놓은 수많은 인생들을 그려보니 참 좋은 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 보니 문득 저는 왜 시와 동화를 좋아하지 않는 팩트-선호형 인간으로 자랐는가 하는 의문이 잠시 들었습니다.
제 얘기를 좀 해보자면, 세 살 때 급성폐렴에 걸려 병원에서 “현대 의학으로는 못 고칩니다. 가서 애기 죽기 전에 맛있는 거나 많이 해주세요.”라고 했던 영화 같은 선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믿기 힘드시겠지만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린 시절엔 몸이 약하고 자주 아파서, 암만 날씨가 좋아도 밖에 나가서 놀지 못하고 집안에서 책만 읽었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황순원의 ‘소나기’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에 창문 밖으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다가 그대로 쭈그려 앉아 창가에 있는 민트색 삼단책꽂이에 나란히 꽂혀 있던 열한 권의 소년대백과사전을 읽곤 했다는 것이죠. 그 책은 염색도, 태닝도 되지 않은 송아지 가죽처럼 옅고 희미한 아이보리 색 하드보드 커버였고, 책 속의 세계는 늘 해외토픽처럼 새롭고 놀라운 역사적&과학적 사실(!)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 이 무슨 회고록 같은 서술인가...) 저는 아직도 제가 좋아했던 페이지들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어요. 그날들의 햇살과 그림자와 책의 그림들마저도 말이지요.
소년대백과사전 전집이 바로 저의 기억에 남아 있는 첫 책이니만치 저는 그런 사실을 다루는 일이 익숙하고 좋은 인간이 된 겁니다... (라고,, 일단 추정을 해봅니다.)
그래서 말이죠. 앞으로도 그런 걸 좋아할 예정입니다.. 만,, 시도, 동화도 한 번씩은 어깨너머로 들춰보고 정신을 함양하는 어른으로 자라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흠흠.
일전에 외국어 학습을 지극히 기능적인 측면으로만 바라보던 지인의 반응이 상당히 못마땅했던 저로서는 담화님이 소개해주신 《여행하는 말들》이나 외국어 학습에 대해 할 말이 많군요.
새로운 언어의 학습이 외국어와 모어의 1:1 대응 학습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담화님의 주장에는 정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저 자신도 그렇게 언어를 감각적으로 익혔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았다면 일본어는 아이우에오의 모양을 한 언어의 알파벳으로 인식하기 힘든 나머지, 진즉 학습을 때려치웠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아이들이 언어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아 엄마가 이런 행동을 할 때 이 단어를 쓰는 걸 보니 이걸 '맘마라고 불러야 하나 보군’이라고 동물적인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감각적으로 하나의 어휘와 특정 상황에 쓰이는 어휘군을 받아들여서 이미지를 구축해 나가고 연결고리를 만들어 확장해 나가는 자연스러운 방식의 학습법은 매우 빠르게 그 언어에 빠져들 수 있게 해 주고, 눈과 귀를 트이게 해 줄 뿐 아니라 해당 언어의 문화까지도 자연스레 습득하게 해 줍니다. 그러다 보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현저히 달라지고 그와 동시에 내면의 세계도 거침없이 확장되겠지요.
하나의 존재 안에 다른 언어로 생각하는 존재가 생겨나는 것이라 저는 이 과정을 ‘정신적 자가 증식’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런 방식으로 학습한 언어는 뒤로 갈수록 부단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고급 언어를 구사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동물적 감각으로 일상생활이 가뿐하기 때문에 언어 수준을 업그레이드하려는 노력을 덜 하게 되는 것이지요.
국어로 학습하는 교과과정이 높아질수록 한 단어의 뜻을 명징하게 정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학습이 되지 않으면 머릿속 생각을 유려하게 표현할 수도 없고, 토론이나 논의는 물론 다와다 요코나 줌파 라히리처럼 좋은 글을 써낼 수가 없겠지요.
담화님이 말씀하신 ‘갈고닦아 씀으로 인해 내게 있는 줄도 몰랐던 어떤 것들을 비춰주는 핀라이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 채, 여행지에서 “추천해 줄 메뉴 있을까요?”를 외국어로 말하는 정도에서 그쳐버리고 말겠지요.
그런 점에서 ‘다와다 요코’나 ‘줌파 라히리’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줌파 라히리 말고도 노력하는 천재, 공공의 적이 또 있습니다.
제가 R1에서 잠깐 언급했던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을 쓴 샤오루 궈는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입니다. 중국의 한 어촌마을에서 태어난 그녀가 영화공부를 위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을 때의 일을 ‘영어’로 써낸 자전적 소설이죠.
이 소설의 재미있는 점은 ‘타자로서의 삶과 연인 관계’를 어설픈 영어 실력으로 쓰기 시작해서 익숙해진 영어로 전보다 더 감각적으로 서술하며 마무리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편집상에도 드러나서 읽은 재미를 더해줍니다.
내가 도착한 첫날, 우리의 대화는 이런 식이다.
나는 말한다. “나 먹어요. 당신 먹어요?”
당신이 올바른 방식으로 나를 고쳐준다. “나 먹고 싶어요. 당신도 나와 함께 뭘 좀 들겠어요?”
당신이 묻는다. “커피 좀 들겠어요?”
내가 말한다. “나는 커피 원하지 않아요. 나는 차 원해요.”
당신은 그것을 바꾼다. “차 한 잔 마시면 기쁘겠군요.”
이내 당신은 내 헷갈리는 얼굴에 웃음 터뜨리고, 당신 말을 바꾼다. “저는 부디 차 한 잔 부탁드립니다.(I would love a cup of tea, please.)”
나는 묻는다. “어떻게 차에 ‘사랑(love)’이라는 말을 사용해요?” p.75
나는 이 나라에 도착한 첫날 이후 배웠던 모든 단어들을 바라본다. 외국인, 호스텔, 영국식 조찬, 올바르게, 안개, 탁수(사실은 ‘탄산수’ 임을 이제 안다.) 참으로 많은 단어들, 지난 1년 동안 나는 참 많은 것들을 배웠다. 공책에 적힌 어휘들은, 나날이, 점점 더 복잡하고 점점 더 세련되어진다.
나는 새로운 페이지, 빈 페이지를 펼친다. 나는 영화 제목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을 적기 시작한다. 내 손에 잡힌 펜은 분노와 깊은 실망을 안다. 내 운명에 대한 분노, 당신에 대한 실망. p.365
두 문단의 차이가 명백히 보이실까요?
당연한 일이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작가가 언어에 익숙해질수록 내면도 성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낯선 땅에서의 어리숙하고 낯설음, 혼란함은 단어로 표현되어 연민을 불러일으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아 성찰과 관계의 고찰을 더욱 명료한 문장과 유려한 표현으로 그려냅니다. 다중 레이어를 언어라는 프리즘으로 비춰보며 오가는 느낌이랄까요. 담화님이 언급해 주신 exophony가 잘 드러나지요. 이 또한 영어 원서로 읽으면 그 재미가 더할 것이라 생각되는군요.
저는 이 소설의 작가가 영화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지 않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영상이라면 이 변화를 너무나 드라마틱하고 멋스럽게 잘 살려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재즈풍의 조용하고 느린 템포의 음악과 짙은 레드브라운과 애쉬브라운 필터를 조금 장착한 느낌의 영상 색채라면 더더욱...
오늘도 N 작하시는 담화님의 창작이 결핍에서 시작된 상상력이라니 놀랍습니다.
제 상상력은 도대체 어딜 간 걸까요?
다만 저는 저의 어린 시절 소년대백과사전을 떠올리며 팩트와 생각을 아우르는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도대체 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