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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Aug 26. 2022

하늘

소소한 사유


어릴 적 조회시간 하늘을 봤다.

수업 시간에도 창문을 통해 하늘을 봤다.


나에겐 땅보다 하늘이 더 가까운 존재라고 느껴진다.

고개 아래보다 위로 향하는 걸 더 좋아했고 위에 계신 분에 대한 궁금증이 항상 머릿속에 자리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소명이라는 이름으로 규정짓고 가두고 또는 풀어주기도 했다. 하늘은 내가 가진 첫 번째 자유이자 속박이기도 했다.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파란 하늘과 변화무쌍한 구름은   머리 위에 존재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운동장의 모래는 나에게 어둠이자 벗어나야만 하는 속박이었고 하늘은  지향해야 하는 아름다움의 색깔이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할 , 가정사가 복잡 다난할  창문 밖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구름을 보면서  위에서 한숨   있다면 수명을 십년 깎아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어릴 적 나는 꽤 비관적이었던 것 같다. 그때도 별로 생의 의지란 게 없었다. 그냥 이대로 편하게 죽는 것, 그 타나토스적 열망과 충동은 늘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에게 그것은 삶만큼이나 본능적인 것이었다. 그것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땅에 가고 싶은 욕망은 역설적으로 하늘에서부터 왔다고 생각했다. 하늘을 사랑하면서도 원망한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타나토스적 열망이 극에 달했을 때 하늘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땐 다 큰 성인이었지만 여전히 하늘 아래 살고 있었고, 늘 그랬듯 하늘을 봤다. 마침 태풍이 오고 있었다. 파란 구름을 순식간에 검은 구름이 뒤덮고 있었다. 화가 날 만큼 빠른 구름들이었다. 그것들은 바람의 소리를 몰고 오고 파괴의 관습을 상기시켜주었다. 솔직히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 어둠보다 강력한 힘은 아니었다. 땅에서는 까만색 끈적거리는 그림자가 올라와 내 발목부터 머리까지 덮치려고 하고 있었고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기 때문에 마냥 하늘을 보고 마냥 무서워할 수만은 없었다. 차라리 부러워했다가 맞는 표현일 것이다. 태풍이 가진 자유로움과 잔인함 그리고 폭력성. 어떤 것으로부터 재단받지 않는 자유. 모든 것이 무서울 정도로 매력적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되고 싶었던 건 구름이 아니었을까? 만약 하느님이 내게 생을 한 번 더 살 기회를 주면서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냐고 묻는다면 난 늘 "구름"이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건 어릴 적부터 가진 나만의 고유한 생각이자 소망이었는데 왜 특별하게 생각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태풍을 보내고 나서 하늘에 대해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서 하늘을 보고 있다. 어쩌면 소망은 하늘과 같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또 그것에다 절망할 정도로 간절한 마음을 걸어두고 싶지 않다. 너무나도 힘든 시간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전과는 명백히 다른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절망적인 바람이 아니라, 긍정적인 시야로 하늘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있다. 하늘이 맑건 맑지 않건 중요한 것은 늘 내 인생의 배경이라는 사실이다. 땅이 어떤 모습을 하건 땅이 존재하는 이상 하늘의 내 평생의 배경이 되고 만다.


하늘의 색깔과 질감을 선택할 수 없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이 위안이 된다. 무수한 선택 속에서 선택하지 못할 영원한 대상이 있다는 건 좋은 도피처이자 무한함과 안전성을 표상하기도 한다.


염원하는 꿈, 염원하는 상대방이 성취되든 성취되지 않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더 이상 쉽게 절망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순리 안에 있다. 내가 이 생에서 행하여야 할 일만 이 하늘 밑에서 다 하고 갈 것이다. 무엇을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할 수 없는 모든 힘과 진실들이 위를 조명하는 아름다운 힘으로 존재하고 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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