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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Sep 01. 2022

동시에 부스럭, 부스럭.

조현철, 이태안의 '부스럭' GV를 다녀와서.



조현철, 이태안 감독의 ‘부스럭’  GV를 다녀왔다. 연기학원을 다닐 때부터 배우이자 감독인 조현철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다.  늘 틀을 깨는 연기를 해야 한다고 배워왔는데 조현철이 D.P에서 보여준 연기는 딱 그랬다. 그의 연기는 치열한 실험의 결과였고 관념을 깨는 그의 습성은 드라마의 신선함과 완성도를 높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배우 천우희의 연기도 기존의 틀을 깨부수는 감독의 작업에 충실히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부스럭’의 그의 명성에 걸맞은 영화였다. 역시나 틀을 깨다 못해 새롭게 창조하고 있다. 이 영화의 질문은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리얼’이 무엇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리얼’은 연기를 하는 사람이면 흔히들 목숨을 걸어야 할 부분이라고 배운다. 일상 그 자체를 연기하는 순간에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사실로 가져오는 것, 모든 연기자의 꿈일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우리가 믿는 일상, 즉 리얼에 대한 의구심으로 시작하더니 이 꿈을 사정없이 분쇄해버린다.


우리는 일상을 어떤 절대불변의 진리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아니, 믿고 싶은 듯하다. 종교도 도덕도 흔들리는 세상에서 지금 발 붙이고 서 있는 땅, 내가 이 시간에 존재한다는 사실만큼 확실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성이 발달할수록 우리는 현재성에 더욱더 큰 진실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감독의 말에 따르면 일상은 재구성에 불과하다. 즉, 우리의 뇌가 편집하고 가공한 상태로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즉 각자가 경험하는 현재성은 다를 수 있다. 세영(천우희)의 일상이 공포로 전환되는 순간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녀가 믿는 절대 불변의 현재가 어쩌면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조그마한 의심이 점점 커지는 순간 모든 것이 아노미로 바뀌고 현철 등의 주변 인물들은 그녀를 보며 비웃는다.


 영화는 탁월하게 관객을 속이기도 하는데  속임 때문에 영화가 끝난 후에 조현철, 이태안 감독이 들어오는 순간에도 카메라가 돌아가면서 우리의 현실을 다시 한번 전복시키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게 한다. 관객을 불안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탁월한 감독의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어떤 감정의 덩어리라도 정확히 관객에게 남길  있다면  만든 영화가 틀림없으니까..



인디스페이스에서 진행된 GV, 티빙의 버전과 다른 편집본이었다.


조현철과 이태안 감독은 확실히 '인상'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여기서 인상이라는 의미는 파격과 공포가 아니라 감각에 기반한 영화를 의미한다. 즉,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감각 그 자체를 믿고 스토리를 밀고 나갔다(결코 부스럭이 비논리적인 영화라는 뜻은 아니다). 흥미로운 소재를 본능에 맞추어 변곡 하면서 새로움을 만들어 나간 시도가 돋보였다. 실제로 천우희 배우는 이 두 명의 감독과 작업할 때 준비해온 많은 것들이 현장에서 바뀌기도 했고, 답을 모두가 찾아가는 작업이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두 감독은 이 변곡이 정확히 어떤 의모였는지, 어떤 메시지인지 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야말로 현장의 공기에 흐름을 맡겨버리는 연출을 한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이런 자유로움이 리얼에 더 가까운 결과물을 창조해낸다. 생각은 유동적으로 변하고 상황 역시 정지해있지 않으며 인간은 끊임없이 이 변동성에서 적응해나가는 동물이기 때문에 정해진 반응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건 리얼함을 추구하는 연기자의 숙명이기도 한데, 예상컨대 조현철 감독이 연기자이기 때문에 이런 변화에 대해 더 열려있었다고 본다.



영화를 감독의 머리 안에 있는 장면을 정확히 현실에 구현하는 작업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시네마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 시네마는 이것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개념이다. 실제로 두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시네마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연기자도 감독의 소모품이 아니며 영화는 충동적일 수 있다. 그 충동은 우리가 여태껏 쌓아온 감각에 기반한다. 이것이 이성적으로 어떤 말이라고 정확히 표현할 순 없어도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를 어떻게 만들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조현철은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았다. 그는 방에서 명상을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들어와서 집중하고 있는 자신에게 포도 한 알을 쥐어주셨다고 한다. 그 순간 그의 손이 포도의 에너지로 무거워졌다. 이 일화는 조현철, 이태안이 생각하는 시네마의 정의와도 맞닿아 있다고도 생각한다. 형용할 수 없는 에너지를 느끼고, 그것을 밀고 붙여 표현하는 것. 영화는 논리적인 작업이라고만 할 수 없다. 우리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 세계, 진동을 직접 경험하게끔 하는 것이 시네마가 아닐까?표면의 언어, 관념, 사고방식으로만은 절대 드러날 수 없는 어떤 세상에 관하여...



멋진 조현철 감독님, 천재만재!


실제로 이 부스럭의 주제는 평행우주였다. 어쩌면 우리 코에서 불과 몇 센티 떨어진 곳에 다른 차원의 세상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은 세상의 개수와 크기를 한정시키기 용이하고 우리는 다른 차원을 아직 납득할 수가 없다. 하지만 감각적으로 냄새를 맡는 방식은 가능하리라 본다. 냄새를 맡다 보면 다른 차원의 세상은 몇 광년 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라 느낄지도 모른다. 


물리학에서는 한 사람이 가진 우주도 수만 가지라고 설명한다.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하냐에 따라 우리의 우주는 경우의 수에 따라 갈라지고 또 갈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한다고만 믿기 쉽지만 사실 다양한 세상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칼 융의 동시성(Synchronicity)은 이러한 물리적 사실에 대한 최초의 심리학적 설명이 아니었을까?


영화 속 세영과 현철의 우주도 현철의 고백의 순간부터 수만 가지로 갈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세영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자신의 다른 우주에 훅하니 떨어져서 공포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고...


충분히 좋은 영화였다. 창작을 하는 사람이라면 영화를 어떻게 만드는가? 에 대한 영화가 될 수도 있고 정신분석학적으로 본다면 한 외로운 인간의 정신적 분열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멜로라고 생각할 수 도 있고. 딱히 무어라고 말하기 어려운 영화이지만 그만큼 세련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논의할 주제가 풍부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답을 주는 매체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매체이다. 다양한 질문을 안고 있는 영화는 만든 두 감독만이 풀 수 있는 문제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도 “부스럭, 부스럭” 작은 진동을 일으키면서 함께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해야만 이 영화의 진가가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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