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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Oct 13. 2022

수용하기 위해 필요한 거리

슬픔에 관한 글

20221013_슬픔에 관하여

C.S 루이스가 아내를 잃고 쓴 글


“치통으로 온 밤을 뜬 눈으로 새웠다. 치통과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일을 생각하면서… 인생도 마찬가지다. 모든 불행에는 그 불행의 그늘과 그림자가 들어있다.  그러니 단순히 괴로워만 할게 아니라, 괴롭다는 사실을 계속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슬퍼하며 하루하루를 살뿐 아니라, 슬퍼하며 하루하루 사는 것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산다.”


고통에 차 있는 것과 고통을 바라보는 건 정말로 다른 문제다.

그 속에 있느냐 그 밖에 있느냐는 정말로 정말로 다른 문제다. 

조금이라도 객관성을 띠려고 하는 순간 비로소 고통으로부터 한 발자국씩 멀어질 수 있다. 


우리는 냉정하게 인식하기 위해 배운다. 이 감정을 잘 정의하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해석과 지표가 필요한 법이다. 가끔은 그 객관성이 나를 다치게 만들지만 정답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해쳤을 뿐이다. 비로소 납득할 수 있는 정답을 찾는다면 그땐 마음이 아프기보다 아리다. 냉정하고 존엄한 현실은 마음에 상처를 내기보다 차분하게 상황을 수용하게 만들고 담대하게 만든다. 결코 긍정적인 감정으로부터 시작한 해맑음이 아니다. 부정적 감정에서 시작한 단단한 용기이다.


슬플수록 냉엄해지려 노력한다. 하지만 절대 사회적 기준에 맞추어서 슬픔을 깎아내리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그 슬픔을 존중하기 위해 최대한 애를 써서 무엇인지 이름을 붙이는 사려 깊은 행위라고 생각한다.


예전엔 사람들이 이 행위를 그냥 넘겨버린다고 생각했다. 충분한 애도도, 감정에 대한 분석도 없이 일상에 내맡긴다고 쉽게 단정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일상을 살아가려는 노력도 슬픔을 이기는 또 다른 방식일지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안일함에 원망이 들기도 한다. 더 고통스럽게 직면하고 꺼내보라고 강요해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만큼이나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 다른 걸. 어떤 사람은 그냥저냥 넘어가도 잘 살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분석과 재정의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도무지 살아갈 수가 없다. 난 안타깝게도 후자였다.  먹고 산다는 것의 비참함을 받아들이기 위해 무려 4년이 걸렸다. 왜 의미 없는 일을 반복적으로 행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 부단히 도 많은 방황을 했던 것이다.  이제는 안다. 인류는 원시인일 때부터 먹고살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일을 멈춘 적이 없다.


이 사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했던가? 긍정에서 긍정이 나올 수 없다. 부정에서 진정한 긍정이 나온다. 그리고 이것은 ‘수용'이라는 단어로 수렴될 수 있다.  이별, 사랑의 상처, 삶의 미스터리함, 세상의 부당함 등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안들이 너무 많다. 온 힘을 다해서 저항하다가 끝끝내 받아들일 상처들이 차고 넘치는 것이다. 


어쩌면 성장이라는 것은 제대로 된 수용에서부터 시작될지 모른다. 신이 아닌 이상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건 내 마음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식의 저항을 하건 또 그 저항이 승리할지라도 우리가 상처받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도 원래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죽음에 저항하여 끝까지 버티더라도 죽는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린 그렇게 매번 시험에 든다. 


슬픈 인생! 하지만 루이스의 글처럼 슬퍼하며 사는 게 아니라 슬퍼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걸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산다. 슬픔과 비로소 거리가 떨어져야만 진정한 수용이 가능하고 삶의 다음 스테이지로 온전히 넘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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