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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Oct 14. 2022

솔직하게 말하는 부끄러움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의 책을 읽다.

작가 '아니 에르노'를 처음 접한 건 부끄럽게도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였다. 그녀가 감독한 자전적인 다큐 ‘슈퍼에이트 시절'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상영되었는데 그 인기가 대단했다. 아마 올해 노벨 수상자 작품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손이 느렸던 나는 당연히 예매에 실패해서 그 영화가 정식으로 개봉하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그녀의 책을 샀다.


슈퍼에이트 카메라를 통해 직접 기록한 그 시절의 아니 에르노, 그리고 가족.


서울에 돌아와서 그녀의 문제작 ‘아니 에르노'를 펼쳐 들고 하루 만에 다 읽어버렸다. 굉장히 흡입력 있는 이야기였다(자전적인 에세이에 가까운 이야기라 소설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 같다).


단순한 열정은 그녀가 유부남이었던 러시아 외교관을 만나 사랑한 후에 느꼈던 소회를 적어낸 글이다. 개인적으로 자기 자신과 너무 접착되어 있는 글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객관성을 확보하고 다듬는 과정이 결여되어 있어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이 글만은 달랐다. 절절한 사랑에 대한 열정, 부끄러우리만큼 솔직한 감정들이 과감하게 표현되어 있다. 단어 하나하나가 폐부를 찌르는 느낌이었고 독특하면서도 정확한 표현이라 달리 이 말 외에 사랑의 아픔을  설명하는 말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정확하고 솔직한 글이었다. 아래에 몇 가지 문장을 소개해본다.


수많은 영상과 몸짓과 대화가 있었던 그 사람과의 첫날밤 이후 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인 기억들, 모스크바의 고양이 조련사, 목욕 가운, 바르비종 같은 모든 것들이 내 머릿속에서
쓰이지 않은 열정적인 소설의 텍스트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들이
서서히 스러지기 시작한다.
살아 있는 텍스트였던 그것들은 결국은
찌꺼기와 작은 흔적들이 되어버릴 것이다.
언젠가 그 사람도 다른 사람들처럼 내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겠지.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그날 저녁 홀연히 왔다 간 그 남자는 예전에 그가 여기 있을 때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사람, 내 글 속의 그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 남자를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


흔히 아니 에르노의 글을 ‘부끄러움'을 담은 글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누군가가 보았을 때 자신을 함부로 생각하게 만들 수 있는 지점도 필터링 없이 담아낸다. 물론 우아한 방식이다. 저급한 단어는 하나도 없이 문학적 서술한다.


표현뿐만 아니라 불륜이라는 소재, 사랑과 이별이라는 소재 자체도 부끄러움이라는 주제에 맞닿아 있다고 느껴진다. 사회적으로 당당해지기 어려운 사랑의 종류일 뿐만 아니라 이별의 아픔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통속적이고 개인적인 주제라 작가들이 의식적으로 피하는 경향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는 망설이지 않고 써내려갔다.


실제로 이 글이 발표되고 문단에서는 아니 에르노에게 실망했다는 평이 많았다고 한다. 개인사적 스토리에 늘 사회적 문제를 담아냈던 그녀가 고작 사랑의 정열 따위를 썼다니!  단순한 열정은 명성 있는 작가로 입지를 굳혀가던 그녀의 발목을 잡는 작품이기도 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 때 처음으로 수세식 화장실을 경험했다는 아니 에르노. 교수가 되면서 중산층의 삶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작품의 진가는 드러나고 있다. 실제로 스웨덴 한림원에서도 그녀의 용기를 높이 산 것 같다. 내가 겪지 않은 일이라면 쓰지도 않겠다고 선언한 이 담대한 작가의 글이 현대에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한 것이 아닐까? 문학 흐름상 생애사적 스토리가 각광받고 있다는 점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글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솔직함이 결여된 세상이다. 말하긴 조심스럽지만 대의적인 가치에 밀려서 여전히 개인의 감정에 대해서는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많다. 종교와 정치 문제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기가 더 조심스러워졌다.  


여성에게 마약을 먹이는 ‘퐁당' 수법이 강남 클럽에서  퍼지고 있다는 기사를 아침에 보았다. 스토킹, 폭행, 강간 등 사랑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폭력은 더 이상 낯선 주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사랑'은 너무나도 오염된 주제가 되어버렸다. 이성애적이고 개인적인 사랑은 저급한 소개팅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가 되어버렸고 우리는 의식 없이 밥을 먹으며 이것들을 소비한다. ‘사랑'은 이제 저속하고 오염된 불결한 단어가 되었다. 이것 말고도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으며 이성애적 사랑을 논한다는 게 예술적으로도 매우 촌스러운 일이 된 것 같기도 하다. 특히 미투 이후로 그 경향성이 짙어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 에코 페미니즘, 동성애, 가족 간의 사랑 등등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려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도 꼭 필요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을 까발려야 했고, 이성애적 사랑에 무시된 수많은 가치들을 되살려올 필요도 있었다. 하지만 아쉬움도 분명 존재한다. 아무리 대의를 위해 일해도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또 상처받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는 늘 수요가 있고 또한 간과하기 어려운 주제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사랑이라는 주제가 소외받은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건강하게 이를 논할 자리가 있는가? 우리가 느끼는 이 영적인 감정을 풀어낼 공간이 있는가?


그래서 아니 에르노의 솔직함이 필요한 시대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40년대생인 여자의 80년대 이야기지만 현대 사회에서 꼭 필요한 태도와 주제를 담담하고 오롯하게 쓰고 있다. 그것이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면서도 용기 있게 나서서 불륜을 고백하고 낙태의 경험을 공유한다.


개인적 경험과 감정들이 사회적 대의를 가지지 않더라도 등 뒤에서만 속삭여야 할 문제는 아니다. 인간이 존엄하다면 사적인 감정들은 대체로(모든 감정이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존중받을 필요는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감정과 생각만 말하고 쓸 수 있다면 독재의 시대에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감정들이 공론화되어서 적극적으로 논의될 필요는 있다.





‘단순한 열정'의 남자 버전도 있다. 아니 에르노의 전 연인이자 33살 연하였던 제자 필립 빌랭이 지은 ‘포옹'이다. 필립 빌랭은 단순한 열정을 그대로 오마주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프랑스판 냉정과 열정일까?). 궁금한 마음에 당장 주문을 했다.


가끔 이렇게 사랑에 대해 순수하게 지적으로 나눌 수 있는 유럽 문화가 부럽다. 오래도록 지성을 키워왔고 그 역사도 깊다 보니 지적 대화를 정말로 향유한다는 생각이 든다.  한 여자 감독님은 한국에서 미아 한센의 ‘다가오는 것들' 같은 영화가 나올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다른 여자 감독님들과 토론을 했다고 한다(이자벨 위페르가 나오는 영화로 사랑과 이별을 철학적 사유와 함께 녹여냈다. 강추!). 모두들 회의적인 답을 했다고 하는데 왜인지 알 것 같다. 한국은 아직 문화적으로 도달하지 못한 범주다. 일단 그런 여성의 지성미를 진심으로 매력으로 생각하며 존경하는 문화가 있는지 잘 모르겠고 사람들에게 그런 지적 열망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먹방, 플렉스, 샤넬 오픈런 등 우리 사회를 뒤덮은 트렌드를 보면 단순한 욕망에 게걸스럽게 기이하리만큼 집착한다. 젊은 세대를 황망하리만큼 건조하게 만드는  비트코인, 부동산, 주식 투자 열풍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세속적 인지도 증명한다. 그래서 아마 우린 이런 종류의 사랑을 쓸 수도 영화를 만들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사회에 동떨어진 이야기가 돼버리기 십상이니까. 가슴 아픈 일이다. 언제쯤 오염을 덜어내고 ‘사랑’이라는 단어의 아름다움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레벤느망이라는 영화도 그녀의 자전적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한다. 통속적인 주제도 우아하고 대담하게 풀어내는 작가라 더 연구해보고 싶다. 나는 얼마나 과거 앞에서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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