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시현 Oct 17. 2022

영화는 풍경을 남긴다.

영화의 단상, 이미지 그것이 담은 깊은 정서에 관하여.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왕가위 감독의 ‘해피투게더' 리마스터링 버전을 다시 봤다. 이 완벽한 영화에서 뭐하나 뒤쳐지는 씬이 없지만 폭포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마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큰 수챗구멍에 빨려 들어가듯이 쏟아지는 장대한 이과수 폭포가 가장 슬프고도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아있지 않을까? 다시 보니 그 폭포 위를 날아다니는 검은색 세때가 보였다. 거대한 소리와 풍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날 수 있는 새는 또 다른 느낌을 전해주었다. 


신의 눈과 같기도, 폭포처럼 쏟아지는 이별의 아픔 같기도 한 이과수 폭포. 어떻게 이런 씬을 찍었을까?


결국 영화가 남기는 것은 풍경이 아닐까?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을 떠올리면 캘거리의 크고 유려한 산을 바라보고 선 주인공의 쓸쓸한 등이 기억에 남는다. 혹은 거대한 산에 둘러싸여 양 떼를 모는 두 주인공들의 작은 모습이 생각난다. 이 영화에서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풍경이 없다면 어땠을까? 이만한 완성도가 있었을까? 주인공을 둘러싼 풍경은 가끔 인물의 표정보다도 더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이 자연을 좋아하는 이유가 자연은 아무런 가치판단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자연이 완전히 가치중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 자체는 가치중립적일 수 있지만 이걸 바라보는 인간은 완벽히 주관적이다. 자기가 가진 감정의 상태대로 자연을 바라볼 것이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기 때문에 감독의 시선에 따라 풍경이 조정되는 측면이 있다.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캐리 그랜트가 남겨진 황량한 옥수수밭 지대는 위기를 고조시키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어딜 가든 숨을 곳이 마땅치 않은 황량한 밭은 쫓아오는 비행기를 피하기에 매우 아슬아슬한 공간이다. 하지만 옥수수밭이 조금 남겨져서 그가 숨을 수 있는 초록의 공간이 나타나면 관객은 잠깐 안도한다. 감독은 양 사이드로 옥수수 잎을 의도적으로 걸고 주인공이 뛰어가야 할 도로가 지금 서 있는 지점으로부터 얼마나 먼지도 보여준다. 풍경은 곧 감독의 의도를 구현하는 장치이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자전거 도둑’은 어떠한가? 세계 2차 대전 직후의 로마 풍경은 황량하고 건조한 텅 빈 풍경위에 겨우 구색을 맞춰 서 있는 옛 건물들만이 로마 제국의 명맥을 근근이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가난에 찌들어 결국 아들 앞에서 자전거를 훔칠 수밖에 없었던 슬픈 가장은 눈물을 훔치며 아들의 손을 잡고 로마의 풍경을 걷는다. 그 풍경 속에 담긴 부자의 비참한 뒷모습 앞에서 눈물이 흐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앞으로 영원히 그 장면이 사진으로 찍혀 나온다 해도 보자마자 슬퍼질 것이다.


편견일 수 있지만 동양계 감독들이 풍경을 사용하는 방식은 서양문화의 감독들과 약간 다르다. 그들은 풍경에 정신과 정서를 담는 경향이 강하다. 앞서 말한 왕가위와 이안 감독도 좋은 예시일 것이다. 한국의 경우  올해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 떠오른다. 산과 바다의 대비는 캐릭터가 가진 정신적 지향을 보여주기도 하고 마지막 바다 씬은 그 자체로 영화가 구축하고자 했던 정서와 완벽한 조응 한다. 휘감아서 원을 그리며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파도만큼이나 서래의 부재와 해준의 상실을 잘 표현할 수단이 있을까? 감독은 아주 우아하게 풍경을 활용한다. 결국 우리는 이 영화를 해질녘의 바다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바다는 정말로 정서를 보여주는 가장 탁월한 매체이다. 토마스 얀의 ‘노킹 온 헤븐스 도어'의 마지막 장면을 보라. 맥주 거품과 같이 볼품없는 파도, 우중충한 하늘만큼이나 우울한 인생을 사는 두 인물. 그들이 모래 바닥에 철퍼덕 앉아 파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고 한 명이 결국 쓰러진다. 파도는 무심하게 계속해서  그들을 향해 달려온다. 여기선 어떤 표정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쓸쓸한 검은색 등과 초라하지만 야성적인 파도를 보며 목 위로 솟구치는 인생의 씁쓸함 같은 걸 느낀다. 


인생의 마지막과 새로운 시작을 보여주는 희망적이면서도 절망적이여서 먹먹한 장면


영화는 이게 다다. 영화는 모든 풍경, 음악, 연기자 등을 활용해서 가장 탁월하게 정서를 고양시키는 매체이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풍경을 하나라도 남길 수 있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믿는 편이다. 심지어 그 풍경으로 영화가 담고자 하는 스토리와 정서를 모두 설명할 수 있다면 세련된 영화의 극치라고 생각한다. 많은 것을 말하지 않고 담지 않아도 한마디, 한 장면으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면 좋겠다. 가장 경제적이고 로맨틱한 일이 될 테니까.


작가의 이전글 솔직하게 말하는 부끄러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