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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Oct 25. 2022

환경주의, 자연을 정복하고 있다는 착각

인간이 언제 자연을 정복하기라도 해 봤나?

"우리는 자연을 정복하고 있는가? "


이 질문에 여러 생각이 떠오른다. 일차적으로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불편함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특히 에코페미니즘이 유행하고 있는 현실에서 자연을 여전히 정복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도덕에 위배되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사안을 보면 인류의 역사는 곧 정복의 역사이다. 수많은 자연법칙을 깨고 진화를 거듭하며 발전해왔고 과학은 곧 자연에 대한 정복의 역사이기도 하다. 핵폭탄은 자연 상태에 있는 물질의 움직임을 변화시켜서 인간의 무기가 되었으며 에너지 활용 역시 자연의 흐름에 내맡겨버린 무언가를 기어이 잡아서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환경오염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져야만 한다. 우리는 자연을 완벽히 정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연이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은 여전히 전쟁 중이다. 인간의 공격에 자연은 코로나라는 병을 퍼뜨리고 기후를 변화시켜 인간을 쓸어버려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대정전 상태도 인간이 제어하지 못했던 전자의 흐름 때문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이렇게 보면 자연은 매우 능동적이다. 사물로서 그냥 수동적으로 존재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지 인간이 컨트롤하고자 했던 흐름을 깨버릴 수 있는 ‘주체'로서 행위하고 있다.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에서 김훈의 역사소설은 역사와 자연의 우열이 전도되어 있다고 말한다. 김훈은 늘 공을 들여 자연을 묘사하는데 그 자연은 고뇌하는 인간과 대비되면서 항상성이 있고 우직하다. 인간이 유한하고 흔들리는 것에 비하면 자연의 힘과 영속성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의 소설에서 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엄연한 주체인 것이다.


자연은 여전히 강건하고 강력하다. 인간은 고대부터 자연의  앞에서 무력한 존재였다. 사실 자연을  번도 완전히 정복한 적도 없다. 그들을 눈속임하며 생명을 유지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일례로 최초의 인류는 아프리카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자신과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땀과 멜라는 세포를 만들어냈는데 이는 자연의 권력을 우회하는 방식으로 생존하였음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환경오염은 인간이 자연을 정복한 부작용이 아니라 정복하지 못해서 나오는 거대한 반발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환경은 인간 앞에 무력하고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니다. 능동적이고 공격적인 정복자이다. 거꾸로 우리는 환경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 굴복할 위험에 쳐해 있다.


자연을 위해 선의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환경주의자 입장은 이 전쟁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아직 감히 선의를 베풀 입장이 아니다. 정복자로서 자연에게 호의를 베풀듯 유연한 정복을 하라는 탄소 배출 제한 협정이나 에코슈머 활동들은 인간이 하는 대단한 착각의 발로이다. 우리는 자연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입장까지 올라선 적이 없다. 자연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면 몰라도.


우리는 이 전쟁에서 지고 있다. 지구는 인간에게 호의적인 환경으로 돌아오기 힘든 상태까지 변화하고 있다. 굴복하고 무릎을 꿇을 때이다. 그들에게 조공을 바칠 때이다. 자비처럼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그들이 좋아하는 조공을 바쳐서 이 틀어진 마음을 되돌릴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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