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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Nov 09. 2022

좋은 작품은 죽음을 다룬다

영화 아무르와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을 보고.

***스포주의


국립극단의 연극을 보기 전 글을 읽고 갔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에 관한 글이었다. 방문 앞으로 죽음이 찾아오고 부부는 갈등한다. 사랑해서 죽일 수밖에 없는 그 이야기에 나는 왜 그토록 공감했는가? 방문을 활짝 열어 죽음을 맞이할수록 도와주는 것, 그것은 상대방에게 주는 최고의 안식이자 로맨틱함이라고 생각했다.


글을 다 읽고 작년과 올해 배움을 구했던 정진새 선생님의 작품을 보러 서울역으로 향했다. 극의 제목은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인류는 살기 위해 따뜻한 곳을 향해 걸었다. 하지만 네임리스원만큼은 생의 소멸을 향해 추운 곳을 향해 걷는다.


무대 구성, 서사의 측면에서도 새로움이 가득한 훌륭한 작품이었다. 배우들의 열연도 덤.


그것 역시 사랑 때문에. 사랑을 위해서 혹은 잊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그것은 죽음과 다르다고 믿고 싶지만 부인할 수 없이 죽음과 동의어일 것이다.


아무르,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모든 사랑은 죽음에 대해 다루고 괜찮은 작품들은 어김없이 이 주제를 피해 가지 못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이토록 죽음을 터부시 하는데도 작품들은 정확히 죽음에 대해 내리꽂아서 설명한다.


많은 영화나 문학이 죽음으로부터 시작하거나 죽음을 향해 달려가거나 죽을 위기에 처한 상태에서 서사가 풀어진다. 사실 우리의 인생도 다르지 않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살고 있지만 큰 그림 안에서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미카엘 하네케의 작품은 섬세한 감정을 극적으로 담아내서 늘 여운이 길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나의 마지막은 곧 나의 시작과 맞닿아 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결과론적으로 지금 어떻게 살 것인가의 질문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의 죽음을 꿈꾸냐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다. 심지어 사랑의 방식도 죽음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과연 죽음을 터부시하고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다면 아무르 속의 남편은 아내를 위해 방문을 열 수 있었을까?  


사랑은 매번 죽음에 대해 묻는다. 우리가 지닌 몸뚱이의 한계를 극복하고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무엇을 우선순위로 둘 것인지, 상대방에게 어디까지 줄 수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굳이 이 사랑이 이성 간의 사랑이라고 한정 짓고 싶진 않다. 모든 사랑이 그러하다.


사랑을 잊기 위해 소멸을 선택하는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의 네임리스 원, 사랑을 위해 소멸을 선물하는 아무르 속의 남편. 어째서 사랑은 끝과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는가?


사랑이 가진 생동감과 무관하게 사랑은 늘 죽음을 맞이한다. 관계의 죽음이든 생물학적 죽음이든 우리의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 건 마지막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이 얼마나 삶을 처연하게 만드는가? 동시에 담담하게 만들기도 한다.


장 뤽 고다르는 이미 죽음을 생각하며 유언을 써놓고 남은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이게 더 합리적인 방식이라는 생각도 든다. 죽음을 생각하고 살아가게 되면 초연해지고 담담해진다. 살아갈 묘한 용기가 생기기도 한다. 그것은 아마도 소멸보다 무서운 것이 세상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거대한 태양도 별도 몇 억년을 살더라도 언젠가는 소멸한다는 사실이 우리의 짧은 삶에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올해 영면한 영화 감독 장뤽 고다르. 그의 회고전이 곳곳에서 열리고 있어 요근래 많은 작품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아니라 용기에 대해 말하고 싶다. 네임리스원이 베링해협 끝에서 소멸을 외쳤다 한들 그녀가 북극해의 바다로 뛰어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소멸을 향하겠다는 결연한 의지, 극동의 땅에서의 자해에 가까운 처절한 걸음은 살기 위한 용기를 얻기 위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끝은 시작과 맞닿아 있고 끝을 치면 올라올 일 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격언은 이런 말이 아닐까?


그녀가 죽음을 향해 내디뎠기 때문에 그녀는 결국 살 것이다. 모든 게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르 속의 남편도 결국 살기 위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딸조차 아버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죽음은 새로운 삶을 선사한다. 그건 천국에 갈 아내에게도 자신에게도 매한가지다.


이 모든 죽음을 향한 여정엔 두 사람의 처절한 용기가 함께하고 있다. 이 용기를 높이 사지 않을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사실 우리 모두는 죽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만 용기를 내서 일상을 보다 발전적으로 만드려 노력한다.


인간의 위대함은 이로부터 나온다. 알면서도 행하는 것. 그것보다 더한 용기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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