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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Jan 12. 2023

봄날의 곰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을까?

클레르 마통의 촬영이 특별한 이유

공백을 깨는 첫 번째 이야기.



그동안 영화에 대한 권태기도 오고 여러 고민도 많았지만 비교적 쉬지 않고 영화를 봤다. 요즘 들어 영화 속에서 나를 사로잡는 지점은 스토리보다는 ‘이미지’ 그 자체다.


영화는 소설과 어떻게 다른가? 심지어 영화는 시나리오로만 남아 있을 수 없고 왜 영상화되어야만 하는가? 이 모든 질문의 답은 ‘이미지’에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지가 주는 감각, 이것이 영화이다.


소설가는 주인공의 내면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음미할 특권이 있지만 극작가에게는 없다. 특히 시나리오 작가는 독백만 긴 대사를 할 수 없다. 이것은 리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중얼중얼 혼잣말을 해도 소설이 담은 내면의 고백, 독백과는 차원이 다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이 지점에서 깊은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이 고민이야말로 영화를 가장 영화답게 만드는 고민이기도 하다. 즐기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랑해”라는 표현 안에 잠식된 수많은 감정의 표현과 소용돌이들을 생각한다면 소설가들은 이 각각의 특별함과 특수성을 발휘할 수 있는 문장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이 숲’에서 “봄날의 곰만큼 네가 좋아, 온 세상 숲에 있는 나무가 전부 쓰러질 만큼”이라는 말로 사랑을 표현한다.소설가들은 문장을 지어서 감각을 전달한다.


소설가가 문장을 고르는 노력만큼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이미지에 대해 고민한다. 어쩌면 소설가와 영화감독은 어떤 재료를 쓰느냐의 차이만 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이 일깨우고 싶은 건 보는 사람의 의식과 감각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영화감독이 화면에 인물을 어떻게 담느냐, 앞 장면과 그 뒤에 따라오는 장면을 어떻게 그리고 언제 배치하는가 등에 따라 관객이 느끼는 감정선은 완전히 달라진다. 어떻게, 무엇을 , 언제 배치하냐에 따라 전달되는 의미와 감정이 달라질 수 있다고 처음 이론을 통해 설명한 것은 러시아 영화인 쿨레쇼프였다. 이를 ‘러시아 몽타주 이론’이라고 부르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미지와 감정의 관계에 대한 법칙이 고안된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몽타주 이론을 넘어서 현대의 촬영기법은 영화학교를 통해 더욱더 활발하게 논의되고 정립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주인공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얼굴 클로즈업 샷이 필요하다던가, 처음 주인공이 등장하는 scene에서는 가장 주인공의 얼굴이 아름답게 도드라져야 한다는 법칙 등이다. 대화 scene의 상대방의 어깨를 걸고 주인공의 얼굴이 보이는 방식으로 주로 표현되고 드라마는 이런 기법들을 매우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영화의 경우는 이런 촬영 기법을 얼마나 활용하는가, 심지어 얼마나 벗어나서 의도한 바를 정확히 꿰뚫느냐가 거장을 가르는 척도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클레르 마통이라는 촬영 감독을 소개하고 싶다. 기존의 촬영 기법, 관습을 타파해서 가장 훌륭하게 목표하는 지점에 도달하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셀린 시아마 감독과 함께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쁘띠마망> 이 있고 알랭 기로디 감독의 <호수의 이방인> 그리고 <스펜서>가 있다.


그가 촬영한 모든 영화에는 ‘애잔함’이 지문처럼 찍혀 있다. 형용할 수 없는 그리움 그 안에서 피어 나오는 깊은 외로움과 슬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 정말 아름답다. 모든 장면에 비추는 따사로운 빛 그리고 완벽에 가까운 구도는 보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다.


클레르 마통의 탁월한 능력 중 하나는 ‘속도감’이라고 생각한다. 천천히 살펴보고 담아낼 줄 아는 감독이다. 섣불리 배우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서 슬픈 표정을 담아내고 싶은 클리셰와 욕구를 누르고 풀샷으로 아름다운 배경 속에 쓸쓸히 존재하는 고독한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게 리얼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 풍경 속에 존재하고 있고 그 속에 존재할 때만 진짜이다. 클레르 마통은 진짜가 무엇인지 아는 감독이고 따뜻함을 담아낼 줄 아는 아티스트이다. 천천히 그 인물을 바라보는 것, 그것만큼 큰 애정이 있을까?



<스펜서>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다이애나비 역)는 풍경 속에 존재한다. 빈틈없이 화려하고 각이 맞춰진 별장, 틈이 없는 사람들 틈에서 서서히 잠식되어 가는 그녀. 그와 반대로 별장을 벗어나면 광활한 초원과 초록의 언덕이 있다. 그가 입은 빨간색 재킷과도 대비된다. 모든 것이 의도된 대비이자 배치이다. 그녀가 가진 갑갑함 그리고 갈망하는 자유를 말하지 않고 이미지로서 보여준다.


영화는 이 순간 살아나고 존재한다. 비록 소설가처럼 ‘나는 답답하고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이 삶 속에 질식되는 느낌을 받았다.’라고 쓸 수 없지만 이미지를 통해 관객들의 머릿속에 단어가 생기기 전에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는 체험하게 만들고 우리는 그 속에 들어가 어떤 느낌을 받는다. 영화관에 나와서 이것이 무엇인지 토론하고 글을 쓰면서 느낌에 걸맞은 단어를 찾아갈 뿐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원시적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감각을 관객에게 그대로 체험시키는 것. 문학이 아니라 영화여야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떤 스토리는 이런 부분에 강점이 있어서 글이 아니라 꼭 영상으로 남아야 한다.


클레르 마통이 촬영한 영화들이 꼭 그런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주인공들이 둘러앉아 소박한 식사와 빵을 나누어 먹는 장면도, 갈대밭에서 쓸쓸히 멀어지는 사랑하는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장면도 이미지였을 때 가장 큰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슬프고도 쓸쓸한 그래서 아름답고 굳건한 어떤 느낌. 글로도 표현되지 않는다. 꼭 그의 카메라를 통해서만 보이는 아름다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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